서도호: 아버지와 나와 딸 3대의 기억 공유, 예술은 치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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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미술가 서도호의 두 전시
“부모 입장에서 아이가 커가는 건 대견하면서도 슬픈 일이다. 딸들이 (7년여 동안) 열중해서 만들던 ‘아트랜드’(점토로 만든 상상의 동식물로 가득한 생태계)에 점차 관심이 줄어서 섭섭한 마음이 드는 와중에 이 전시를 열게 됐다. 그런데 미술관에서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좋아하는 소리를 들으니 그들이 우리 딸들이 커서 떠나가는 빈 자리를 채우는 느낌이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3월까지 열리는 ‘서도호와 아이들: 아트랜드’ 전시와 관련해 미술가 서도호(61)가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서 작가는 건축물, 특히 그가 살아온 집들을 반투명한 천으로 재현해서 마치 건축물의 혼령 같은 느낌을 주는 설치미술로 세계적 명성을 얻어 왔다. 그런데 이 전시에 나와 있는 작품은 스타일도 느낌도 전혀 다르다. 알록달록 점토로 만들어진 작고 귀여운 사람·동식물·외계생명체가 한데 모여 테이블 60여 개에 걸쳐 펼쳐지며 거대한 생태계와 우주를 이루고 있다. 말 그대로 ‘서도호와 아이들’의 협업 전시이기 때문이다.
그 시작은 작가의 어린 두 딸이었다. 큰딸(12세)이 네 살일 때 점토로 조물조물 상상의 세계 ‘아트랜드’를 만들기 시작했고, 작은딸도 합류했으며 그들을 지켜보던 작가가 거들었다. 특히 팬데믹 기간에는 클레이가 주는 심리 안정 효과를 톡톡히 보면서 “세상 만사 다 잊고” 아이들의 아트랜드 건설을 도왔다. 아이들이 전적으로 주도한 아트랜드는 색채와 형태뿐만 아니라 세계관까지 경이롭다. “여기에 사는 존재들은 성별이 없고 계급도 없고 영적이긴 하지만 종교가 없다더라. 그 조그만 아이들이 어떻게 그런 유토피아적 생각을 했을까”라고 작가는 말했다.
그러한 ‘아트랜드의 섬들’ 중 하나가 북서울미술관으로 옮겨졌고, 그것을 참고해서 미술관에 오는 아이들이 각자 만든 점토 생명체로 아트랜드를 확장시키고 있다. 큰 인기 속에 지금까지 1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 참여하면서 처음 몇 개의 테이블 위에서 시작된 세계가 60여 개의 테이블로 확장되고 한층 풍부해졌다.
서 작가의 작품세계에 나타난 새로운 요소인 ‘부성(父性)’은 리만머핀 서울 갤러리에서 26일까지 하는 ‘삼세대: 서세옥(1929-2020)을 기리며’에도 나타난다. 그의 아버지이자 한국 수묵 추상화의 대가인 고(故) 산정 서세옥을 기리는 전시로서, 서도호 작가뿐만 아니라 부인 레베카 보일 서, 그들의 두 딸, 서 작가의 동생인 서을호 건축가와 김경은 건축가 부부, 그들의 자녀까지 참여해 산정을 추억하거나 가족 서로를 그린 작품을 선보인다. 관람객은 이 전시에서 산정의 철학과 그의 성북동 한옥 공간이 설치미술가 아들과 건축가 아들에게 어떻게 이어졌는지 진지하게 살펴볼 수도 있고, 어린 손주들이 할아버지 그림의 특징인 ‘수묵 인간 현상’을 기발하게 변형해서 따라 그린 것을 보고 웃음을 터뜨릴 수도 있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코로나19 때문에 빈소 없이 치른 상태로 2년이 훌쩍 지났다. 그래서 아버지를 추모하는 동시에 그와 공유했던 3세대의 아름다운 기억을 축하하기 위해 이 전시를 열었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정말 많지만 이런 식으로 일종의 매듭을 지어주지 않으면 그냥 심연 속으로 사라져 버리게 될 것 같아서였다”라고 서 작가는 설명했다.
이 전시에서 눈에 띄는 서도호 작가의 새로운 작품은 ‘Time Pockets(시간의 주머니)’다. 흰색 어린이용 원피스 두 벌에 투명한 주머니가 여러 개 달려 있고 그 안에 작은 장난감·색연필·머리띠 등 가지각색 물건이 하나씩 담겨 있다. “딸들이 인생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면서 한때 늘 갖고 놀거나 썼지만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물건들이 자꾸 생긴다. 지나간 한 시대의 유물들인 셈이다. 그것들에 얽힌 기억을 버릴 수 없어서 대표적인 것들을 골라 주머니에 넣어 아이의 지나간 한 시대를 상징하는 옷을 만들었다”고 작가는 설명했다.
딸들에 대한 아버지의 깊고 따스한 사랑뿐만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라지고 잊혀지는 것들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우수, 그리고 그것에 대응해 기억으로 얼마나 존재를 연장시킬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작가의 질문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다음은 작가와의 일문일답.
Q : 작가님의 반투명 집 설치작품은 구조적으로 엄정하고 이지적인 면이 강했는데, 지금 두 전시에 나온 작품들은 정서적인 면이 예전 작업보다 강한 것 같다. 부성(父性)과 관련이 있는가?
A : “지금 시드니의 호주 현대미술관에서 내 개인전이 진행 중인데 집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관람객이 많다고 그곳 큐레이터들이 전했다. 그들은 내 작업이 “emotional(감정을 자극)”하고 “poetic(시적)”이라고 하더라. 방법론적으로는 이지적이더라도 원래부터 감정적인 부분이 있지 않았나 싶다. 집이란 것이 개인적이고 내밀한 공간 아닌가.”
A : “큰 변화가 있다.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나도 나이가 많았고(만 48세에 첫딸을 얻었다.) 내 아버지는 연세가 아주 많았기 때문에 생과 사를 같이 생각할 수밖에 없는 교차로에 있는 느낌이었다. 평소 불교의 연기설에 관심이 많아서 어떤 현상을 독립된 개체로 보지 않고 큰 연결고리들의 일부로 바라보곤 했는데, 아이가 태어나면서 아버지와 나와 딸 이렇게 3대를 일종의 한 단위, 기억을 공유하는 단위로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생겼다. ‘삼세대: 서세옥을 기리며’ 전시의 바닥에 이 생각이 깔려 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기억에 남는 이벤트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도 전시를 열었다. 인생이라는 것은 결국 기억이다. 수많은 기억(memory) 중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느냐(memorialize)의 문제가 내 작품세계의 근간이다. 그렇다는 것을 최근 몇 년간 깨달았다.”
Q : 그러고 보니 작가님의 반투명 집 작업의 경우에도, 디테일이 정교하지만 작가님이 예전 인터뷰에서 “사실은 최소한만 재현한 것이다. 집들과 관련된 기억과 그 분위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만큼의 최소한도로 말이다”라고 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A : “그렇다. 그 작업은 집 자체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결국은 집에 대한 기억과 그 기억을 어떻게 불러낼 것이냐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예전부터 나의 작업은 시간과 공간, 그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한 것인데, 돌이켜 보면 그것이 다시 기억과 관련된 것이다. 내 아이들의 경우에도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기억과 성북동이라는 장소와 거기서 보낸 시간이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런던에 살지만 1년에 한두 번씩 할아버지 집에 데리고 왔기 때문에 서울 성북동 한옥과 정원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성북동에 대한 기억이 그 애들의 자아 형성에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Q : ‘아트랜드’도 기억과 관련이 있는가?
A : “‘아트랜드’는 딸들과의 소중한 순간을 기억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모든 부모가 사진 앨범을 만드는 등 여러 방법으로 기억을 할 텐데, 중요한 것은 번거롭게 노력을 하지 않으면 기억은 그냥 흩어진다는 것이다. 이 기억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도 나누고 싶었다. 딸들이 성장해서 아트랜드를 점차 떠나고 있어서 서운한 마음이었는데, 이번 전시를 통해서 다른 아이들이 아트랜드를 영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크게 고무됐다. 이 전시는 지금 유럽 미술관 쪽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팬데믹 이후에 미술관들이 가족을 불러들여 치유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팬데믹 때 제일 힘들었던 사람들이 아이들이었지 않은가. 이번 전시를 통해 예술이 그들을 치유해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작가와 관람객 모두에게 예술은 치유가 될 수 있다.”
문소영 문화전문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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