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 헨델, 영어 오라토리오 만들어 영국 영웅 됐다

2023. 1. 21.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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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에두아르 아망이 수상음악 장면을 그린 그림 ‘헨델과 조지 1세’. [사진 사회평론]
헨델. 어릴 적 음악 선생님은 헨델을 음악의 어머니라고 했다.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이고. 아무리 긴 가발을 썼다고 해도 엄연히 헨델도 남자인데 바흐의 아내라니. 두 남자가 어떻게 부부가 되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표현이었을 것이다. 바흐와 헨델은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두 거장이다. 그래서 헨델을 빼고 바흐를 말할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바흐와 헨델은 독일 작센 지방에서 1685년에 태어난 동갑내기이다. 하지만 그 후 이 둘이 보인 삶의 여정은 매우 달랐다. 바흐가 자신이 섬기는 군주와 교회에서의 삶에 충실했다면 헨델은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 했다. 바흐가 평생 독일을 벗어나지 않았던 것과 달리, 헨델은 젊어서부터 유럽의 대도시에서 명성을 쌓았다. 그는 일찌감치 런던에 진출해서 영국을 대표하는 국민 작곡가가 되었으며 경제적으로도 풍족하게 살았다. 게다가 그의 작품들은 사후에도 한 번도 잊힌 적이 없이 줄곧 연주되고 있다. 이만하면 예술가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최고의 삶이 아닌가.

오라토리오 소재는 주로 성경 이야기

그러나 결과가 좋았다고 해서 헨델의 일생이 항상 평탄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대영제국 영국인들의 긍지가 하늘을 찌르던 시대에 변방의 외국인이었던 헨델에게 이런 행운이 저절로 찾아왔을 리 만무하다. 헨델의 성공은 불굴의 의지와 멈추지 않는 도전정신, 그리고 기대하지 않은 행운이 만들어 낸 합작품이다. 그의 결단은 언제나 빨랐고,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불같이 뜨겁게 밀어붙였다.

첫 번째 도전은 18살 때 고향 할레를 떠나 함부르크로 향한 것이었다. 헨델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대학에 들어갔으나 음악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할레 대성당의 오르간 주자로 활동했고 교회에서 칸토르 자리를 제안 받았다. 그러나 편안한 삶 대신 당시 최고 공연형식이었던 오페라 작곡가가 되겠다는 자신의 꿈을 쫓아 한자동맹의 중심이자 유럽 최대의 항구도시였던 함부르크로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페라 작곡가로서 성공적인 데뷔를 하면서 그 재능을 인정받게 된다.

그는 이 작은 성공에 머무르지 않고 미련 없이 유럽 음악의 중심지이자 오페라 종주국이었던 이탈리아로 떠났다. 4년간 이탈리아 생활을 마치고 스물다섯 살의 젊은 나이로 독일 하노버 공국의 궁정 카펠마이스터가 된다. 당시 하노버를 다스리던 게오르크 선제후와 그의 모친 소피아 공녀는 헨델을 매우 환대했다. 하지만 세계적인 오페라 작곡가로 성공하고 싶은 헨델에게 하노버는 너무 작은 연못이었다. 하노버에 온 후 불과 몇 개월 만에 그는 휴가를 내고 런던으로 향했고 결국 그곳에 정착하기로 한다.

할레 대성당. [사진 사회평론]
런던은 오페라의 불모지였으나 비싼 공연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 부유한 청중은 많았으니, 헨델에게는 엘도라도와 다름이 없었다. 런던에 도착한 헨델은 오페라 ‘리날도’를 영국 무대에 올려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유명한 아리아 “울게 하소서”가 나오는 바로 그 오페라이다. 헨델은 ‘리날도’를 앤 여왕의 생일 주간에 맞추어 초연하고 대본을 앤 여왕에게 헌정하는 센스를 보였고, 여왕의 신임을 얻은 헨델은 곧 여왕 극장의 상주 작곡가로 임명 받는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헨델을 총애하던 앤 여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사망하고 만다. 더 큰 문제는 헨델이 떠나온 하노버의 게오르크 선제후가 영국 선왕의 외손녀가 낳은 아들이라는 자격으로 영국의 왕이 된 것이다. 그가 베푼 호의를 무시하고 더 좋은 조건을 찾아 영국으로 왔건만, 그가 조지 1세가 되어 영국의 왕으로 오다니 후환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템스 강에서 왕족들의 뱃놀이가 있던 날 헨델은 배 위에 오케스트라를 태워서 예정에 없던 환상적인 ‘수상음악’ 연주를 펼침으로써 모든 이들에게 본인의 재능을 알렸고 조지 1세를 크게 감동시켰다.

극적으로 왕의 용서를 받고 신임을 얻었지만 헨델 앞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인기는 높았으나 공연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관객의 수익만으로는 운영이 힘들었고, 결국 극장이 문을 닫게 된 것이다. 하지만 헨델은 좌절하지 않고 오페라 회사를 설립하고 부유한 귀족들로부터 투자를 받아냈다. 왕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오페라단의 이름을 ‘왕립 음악 아카데미’라고 붙였고, 유럽에서 제일 잘 나가던 최고의 작곡가와 성악가들을 스카우트해서 런던으로 데려왔다. 그 결과 오페라는 흥행에 성공한다.

‘할렐루야’ 합창에 감동한 왕, 벌떡 일어나

할레의 마르크트플라츠에 세워진 헨델 동상. [사진 사회평론]
하지만 스타들의 몸값 때문에 오페라단은 곧 적자로 돌아섰고, 콧대 높은 스타들 간의 지나친 질투와 싸움은 경쟁 구도를 즐기던 청중들조차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더 큰 문제는 이로 인해 헨델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치게 되고 그의 음악적 영감이 완전히 소진된 것이었다. 더욱이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가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며 오페라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다. ‘거지 오페라’는 이름만 오페라일 뿐 노래가 나오는 연극으로, 왕립 음악 아카데미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탈리아어 오페라에 집착하는 상류층의 위선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고발했다. 설상가상으로 왕에 반대하던 귀족 세력이 ‘귀족 오페라단’이라는 이름으로 헨델의 오페라단에 맞설 오페라를 창단한 것도 헨델의 스트레스를 가중시켰다. 52세가 된 헨델은 급성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졌고 마비 증상까지 보였다.

일생일대의 위기에 놓였지만, 다시 한번 헨델은 그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과감히 이탈리아 오페라를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다. 바로 영어 오라토리오이다. 오라토리오란 종교적 내용을 담고 있는 여러 개의 합창과 독창으로 구성된 일종의 극음악이다. 가톨릭교회의 기도소인 오라토리오에서 연주되던 음악이라서 오라토리오라는 이름이 붙은 것인데, 헨델은 이 양식을 영국에서 오페라를 대체할 새로운 장르로 재탄생시켰다.

오라토리오는 무대 연기가 없었기 때문에 화려한 무대의상이나 첨단 무대장치가 필요하지 않았다. 내용은 주로 성경 이야기였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는 에스더. 초기 가나안 땅에 정착하던 시기에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었던 여인 드보라. 데릴라의 유혹을 물리치고 놀라운 힘을 발휘해 적을 멸망시키는 삼손. 이스라엘을 공격해온 거인 장군 골리앗을 물리친 양치기 소년 다윗. 어린 다윗을 질투해 죽이려고 하다 결국 전장에서 죽음을 맞는 사울. 성경에서 가져온 오라토리오의 소재는 다채롭고 흥미로웠으며 청중들은 뜨겁게 환호했다.

잇단 성공에 고무된 헨델은 아예 극적 스토리가 없는 오라토리오를 작곡한다. 그의 이름을 온 세상에 각인시킨 불멸의 걸작 ‘메시아’이다. ‘메시아’는 구약성경의 예언에서 시작해 그리스도의 삶을 거쳐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훑으면서 인류를 죄악에서 구해내는 기독교의 중심 교리인 구속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전체 53곡으로 총 연주시간이 2시간 50분이나 되는 대작이다. 다이내믹하면서도 웅장한 음악과 서정적이면서도 동시에 장엄한 분위기는 듣는 이들을 압도하는 강한 호소력을 지닌다.

‘메시아’를 처음 선보였을 때 그 인기는 이전에 공연된 모든 오페라를 능가했다. 공연을 보겠다는 사람이 너무 많아 한 사람이라도 공연장에 더 들여보내기 위해 남자들은 칼을 차지 말고 여자들에겐 페티코트로 부풀린 드레스를 입고 오지 말라고 공지해야 했을 정도다. 객석에 앉아 있던 왕이 ‘할렐루야’ 합창을 듣고는 너무 감격에 찬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는 일화는 너무 유명하다. ‘메시아’를 통해 헨델은 기독교 교리를 설파하는 도덕적 음악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사망 이후 왕족이나 국가 최고의 위인들만 안치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영광을 얻게 된다. 이 정도면 헨델이 부러워지지 않을 수 없다. 헨델만큼 행운이 따랐던 음악가가 또 있을까.

다들 새해 전망이 어둡다고 한다. 늘 하던 대로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성공하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과거의 성공이 오히려 미래의 발목을 잡는다. 그래서 힘들고 불안하다. 그래도 궁하면 통한다고 하지 않는가. 헨델은 어려울수록 타개책을 깊이 궁리했고 과감한 변신을 시도했다. ‘수상음악’이 그랬고 영어 오라토리오가 그랬다. ‘메시아’는 그 절정이다. 그러니 도전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지. 행운은 항상 그런 사람들의 편이었으니까.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 ‘독재자와 음악’ ‘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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