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무기 다룰 줄 알아야” 스탈린, 장징궈에 권총 선물

2023. 1. 21.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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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60〉
중·소 우호 동맹조약은 파행을 반복했다. 1945년 8월 7일, 소련의 동북 출병 전날 타결됐다. 소련 외상 몰로토프의 서명을 바라보는 쑹즈원(오른쪽 다섯째)과 스탈린(오른쪽 넷째). [사진 김명호]
1944년 11월, 중국주재 미국대사에 임명된 헐리(Patrick Jay Hurley)는 스탈린의 의중을 알고 싶었다. 부임지 충칭(重慶)으로 향하던 중 모스크바를 지나치지 않았다. 스탈린과 외상 몰로토프는 헐리를 통해 장제스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소련은 중국공산당(중공)에 흥미를 잃은 지 오래다. 자본론이나 제대로 읽은 사람들인지, 중국의 전통적인 농민반란 집단인지, 중화 민족주의자 그룹인지, 정체가 불분명하다. 소련은 국민정부와 관계증진을 희망한다.”

1945년 1월, 중국주재 소련대사관 대변인이 장징궈(蔣經國·장경국)에게 제안했다. “스탈린 서기장과 장제스 위원장의 만남을 성사시키자.” 장징궈도 동의했다. 보고를 받은 스탈린은 결정을 뒤로 미뤘다. 장징궈는 먼저 제의한 소련의 딴청에 실망이 컸다. 2월에 열릴 얄타회담 때문이라는 것을 알 턱이 없었다.

장제스, 루스벨트 사망 소식에 눈물·웃음

일본 패망 소식에 열광하는 대륙 거주 대만인들. 1945년 8월 16일,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 [사진 김명호]
당시 미국은 “중국대륙과 동남아에 포진한 일본군 격퇴 방안은 지상 작전이 유일하다. 중국은 그럴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스탈린이 중공에 대한 기대를 접은 것처럼, 루스벨트도 국민정부를 믿지 않았다. 외교관, 언론인, 중국주재 기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전구(戰區) 참모장 스틸웰의 국민당 비난은 도를 넘을 정도였다. 선전의 귀재들이 즐비한 중공 근거지 옌안(延安) 쪽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긍정적인 소식도 루스벨트의 중국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동년 2월 4일, 크림반도의 휴양지 얄타에서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이 회동했다. 루스벨트의 목표는 일본과 중립(불가침)조약을 체결한 소련의 전쟁참여와 일본이 탈취한 중국영토, 동북과 대만의 수복이었다. 스탈린에게 요구했다. “동북(만주)을 해방시킨 후 중국의 주권을 존중해야 한다. 내정 간섭은 금물이다.” 자신의 구상도 털어놨다. “미·소 합작으로 중국에 국·공 연합정부를 출범시켜 내전을 방지하자.” 2월 11일 회의 마지막 날, 밀약(密約)도 맺었다. “소련은 독일 패망 90일 이내에 일본과 전쟁에 돌입한다. 시베리아 해안 밖의 쿠릴열도(千島群島)는 소련에 귀속시킨다. 중동철도(中東鐵道)와 남만주철도는 중·소 양국이 공동 운영한다. 군항(軍港)인 뤼순항(旅順港)은 소련이 영구 조차(租借)하고 다롄항(大連港)은 무역을 위해 국제화시킨다. 동북(만주)에서 소련의 이익 추구를 보장한다. 외몽골은 소련 공제(控制)하에 명의상 독립을 유지한다. 모든 사항은 장제스 위원장의 동의가 필요하다. 단, 동북에 출병하기 전까지 장 위원장에게 비밀로 한다.”

“스탈린 집무실 벽에 피터대제 초상화”

일본 패망 후 동북에 도착한 중공의 동북성 서기 린뱌오(林彪). [사진 김명호]
새로운 세계지도도 구상했다. 독일과 조선을 둘로 쪼갰다. 스탈린은 중국도 장강(양자강) 이북은 중공, 남쪽은 국민당으로 분할 시키는 것이 소련에 이익이라고 간주했다. 안될 경우 국민당보다는 중공이 중국을 장악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얄타회담 직후 마오쩌둥에게 회담 내용을 통보했다. “우리가 동북을 해방시킬 때를 대비해라.” 루스벨트에게도 건의했다. “일본에 선전포고하기 전 국민정부와 우호 동맹조약을 체결해 한동안 중단된 군비 원조를 회복시키겠다.”

국·공 양당은 미국의 연합정부 수립 권고를 거부하지 않았다. 중공대표로 충칭에 온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수시로 국민당 대표와 담판했다. 중공의 주장은 항상 똑같았다. “연합정부를 수립하면 군사조직을 해산시키겠다.” 국민당 대표도 마찬가지였다. “중공이 군사조직을 해산시킨 후라야 연합정부 수립이 가능하다.” 3월 말 장제스가 국민대회를 소집했다. “1당전제(一黨專制)를 끝내기 위한 신헌법 제정이 절실하다. 전문가들이 지혜를 모아주기 바란다”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중공도 전국대표자대회를 열었다. 당장(黨章)에 있는 소련과 세계공산혁명 같은 용어들을 삭제하기로 합의했다. 당의 강령도 바꿔버렸다. “마오쩌둥사상을 당의 지침으로 한다.” 스탈린도 팔짱만 끼고 있지 않았다. 4월 6일, ‘소·일 중립조약’ 파기를 선언했다. 1주일 후 오후 6시, 저녁 마치고 정원 산책하던 장제스에게 부관이 달려와 보고했다. “방금 루스벨트가 사망했다.” 은원이 많았던 루스벨트의 사망 소식에 장은 눈물과 웃음을 반복했다. 군과 정부기관에 지시했다. “일주일간 조기를 게양하고 추도식을 거행해라.” 5월 8일, 나치 독일이 투항했다. 남은 건 일본이었다. 스탈린이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특사 홉킨스에게 다짐했다. “8월 8일 동북에 군을 파견하겠다. 일본과 군사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장제스와 중·소조약 체결이 시급하다. 장제스는 중국의 유일한 지도자다. 우리 군대가 동북을 점령한 후 장제스가 지방정부를 조직하도록 협조하겠다.” 작전 계획도 상세히 설명했다.

장징궈는 술과 여자를 너무 즐겼다고 말년에 후회했다. 1964년 타이베이. [사진 김명호]
장제스는 협상 대표를 물색했다.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의 오빠 쑹즈원(宋子文·송자문) 외에는 적임자가 없었다. 행정원장에 임명한 후 당부했다. “대표단 이끌고 모스크바에 가라. 외교부장도 겸직해라. 장징궈를 수행원에 포함시켜라.” 하버드 출신인 쑹은 좌익색채가 강한 장징궈가 맘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쑹즈원은 스탈린과 다섯 번 회담했다. 직급이 낮은 장징궈는 두 번만 참석했다. 스탈린은 장징궈에게 신경을 썼다. 장징궈의 소련인 부인과 소련에서 태어난 아들 근황 궁금해하며 예쁜 권총까지 선물했다. “남자는 어릴 때부터 무기를 장난감처럼 다룰 줄 알아야 한다.” 하루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장징궈와 오랜 시간 사담을 나눴다. 쑹즈원의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장징궈가 모스크바에서 부친에게 보낸 전문 한 통을 소개한다. “스탈린의 집무실 벽에 피터대제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레닌이 탱크 위에서 연설하는 그림이 걸려있던 자리입니다. 그림이 바뀐 것은 관점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민족주의가 의식형태를 눌렀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에겐 기쁜 일입니다. 국가 이익을 놓고 흥정해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상대라고 장담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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