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불모지’ 부산서 영화제? 주변 만류에도 밀어붙여
[김동호 남기고 싶은 이야기] 타이거 사람들 〈25〉 부산국제영화제 창설
내가 부산에서 국제영화제를 창설한다고 하자 주변에선 ‘문화 불모지’ 부산에서 국제영화제가 성공하겠느냐는 우려가 컸다. 젊은 영화인들과 어울려 대규모 국제행사를 벌이다 패가망신할 수 있다며 극력 만류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오기와 집념’으로 밀어붙였다.
96년 9월 해운대 야외상영장서 팡파르
그 1년 전인 95년 8월 18일 오전 10시 서울시청 앞 프라자호텔 커피숍에서 이용관 경성대 교수, 전양준 영화평론가, 김지석 부산예전 교수와 김유경 영화사 ‘열린판’ 대표를 만났다. 모두 초면이었다. 이들은 부산에서 국제영화제 창설을 준비 중이라며 내게 ‘선장’ 격인 집행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부산 파라다이스호텔에서 5억원을 지원받기로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줬다. 처음엔 망설였지만, 김지석 교수의 열정과 의지에 마음이 흔들려 승낙했다. 당시 공연윤리위원회(현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을 2년 반 만에 ‘자의 반타의 반’으로 물러나 4개월째 쉬고 있었기에 새로운 도전을 해보려는 마음이 앞서기도 했다.
이들이 부산에서 국제영화제를 만들기로 한 배경에는 92년 6월 열렸던 이탈리아 페사로영화제가 있었다. 91년 11월 8일 내가 사장을 맡고 있던 영화진흥공사에 아드리아노 아프라 페사로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스위스 바젤에 사는 임안자와 함께 찾아온 게 시작이었다. 아프라는 한 달간 서울에 머물며 한국영화 100편을 보고 ‘만다라’(81) 등 임권택 감독 작품 9편과 김기영 감독의 ‘하녀’(60),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61) 등 30편을 선정해 이듬해의 제38회 영화제에서 ‘한국영화특별전’을 열었다. 이장호·배창호·박광수 감독과 배우 안성기, 평론가 이효인, 특별전 책자를 쓴 이용관·전양준·김지석 등 영화인 8명과 내 후임인 윤탁 영화진흥공사 사장도 초청했다.
영화제 창설을 앞두고 무엇보다 먼저 부산의 영화인과 언론인에게 성원을 부탁했다. 경성대 주윤탁 교수와 김사겸 감독을 중심으로 한 영화계 인사들, KBS·MBC·부산방송(PNN) 등 3개 방송국과 부산일보·국제신문 등 2개 신문사의 사장·임원과 편성·편집 국장과 부장, 그리고 부산일보 김은영 기자 등 영화담당 기자들을 만났다. 그 결과 제1회 영화제부터 부산의 모든 언론매체가 대대적으로 보도해 성공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문화공보부 기획관리실장 때 자주 만났던 오세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수석전문위원이 마침 부산시 정무부시장을 맡고 있어 그를 통해 문정수 시장을 소개받고 부산시의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약속받을 수 있었다. 박광수 감독을 부집행위원장으로 영입하고 이용관(한국영화)·김지석(아시아영화)·전양준(세계영화)을 프로그래머로, 오석근 감독을 사무국장으로 각각 선임했다. 서울을 방문한 영국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스가 자문위원으로 준비팀에 합류했다. 우리는 마이티브이와 강남의 음식점에서 수시로 만나 창설할 영화제의 성격·규모·장소·추정예산 등을 논의했다.
홍콩영화제 프로그래머에서 물러난 웡 아인링, 스위스의 임안자, 미국의 임현옥을 프로그램 컨설턴트로 영입했다. 한국에서 열린 국제세미나에 참석한 샌프란시스코 아시아아메리카영화제 폴 이 집행위원장을 설득해 영화제가 끝날 때까지 귀국을 미루고 우리와 함께 일하게 함으로써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필립 쉬어 싱가포르영화제 집행위원장에게 부탁해 4월에 열린 이 영화제에 오석근 사무국장과 새로 채용한 김정화를 파견해 영화제 운영을 체험하게 했다.
96년 2월 13일 부산시청 회의실에서 문정수 시장을 조직위원장으로, 문화계 및 언론사 대표들을 조직위원으로 하는 사단법인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를 출범해 6월 4일 요트경기장의 부산사무실에서 현판식을 열었다. 문제는 파라다이스호텔이 약속했던 5억원의 협찬이 95년 연말에 취소돼 예산확보가 초미의 과제가 됐다는 점이었다. 내가 해결사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 준비과정에서 오세민 부시장이 5000만원을 신용대출로 빌려줘 당장의 불은 끌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22억원의 예산 중 부산시 보조는 3억원에 그쳤고, 영화관 입장료 수입 4억원을 제외한 15억원은 협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부산 기업인 100명을 파라다이스 호텔에 초청해 ‘부산국제영화제 후원의 밤’을 열었다. 김동건 아나운서, 김지미·남궁원·윤일봉·강수연 배우와 임권택 감독이 모금행사에 참석해 협찬을 권유했다. 고려산업·동성화학·진영수산·동성여객·자유건설·우성식품·유니크·태화백화점 등 8개 기업에서 2억원을 협찬하는 등 모두 4억원을 모았다.
프로그래머들은 베를린·홍콩·칸 영화제에 가서 작품 선정과 초청 작업을 진행했고, 나는 주로 영화인을 만나 부산영화제 창설을 알리고 초대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칸에서 88년 몬트리올에서 만났던 피엘 리시앙의 소개로 질 자콥 집행위원장을 비롯한 많은 영화인을 만났다. 5월 11일 전통식당 ‘가브로슈’에서 칸의 선정위원인 막스테시에, 베를린의 울리히 그레고르, 낭트의 알랭 잘라도, 몬트리올의 세르주로지크, 뮌헨의 클라우스에더, 로테르담의 사이먼 필드 등 15명의 집행위원장과의 오찬 회동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다짐받으며 영화제 성공에 대한 자신감을 얻게 된 것은 큰 성과였다.
창설 6년 만에 아시아 대표 영화제 공인
준비과정에서 문정수 시장에게 매주 관사에서 조찬회의를 하자고 제의해 주무관부터 계장·과장·국장까지 올라가는 관료적인 결재과정을 단축함은 물론 ‘지원은 하되 간섭은 배제한다’는 원칙을 제도화시켰다. 특히 제1회 개막식에서 대통령의 영상 메시지만 상영하고 참석한 장관·정치인의 축사는 모두 배제했다. 대선이 있던 제2회 영화제 때는 영화제에 참석한 김대중 야당 후보와 이회창 여당 후보의 소개나 무대 인사를 모두 거절해 정치와 거리를 두는 전통을 세웠다.
제6회 영화제가 끝난 2001년 12월 1일 유럽연합(EU) 산하 유럽아카데미가 주최한 세계영화제 집행위원장 ‘정상회의’에 칸·베를린·베니스·선댄스·토론토·카를로비바리·산세바스티안·로테르담과 함께 부산영화제가 초청받아 창설 6년 만에 아시아권을 대표하는 영화제로 공인받았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은 매년 200여 스태프, 800여 자원봉사자의 열정과 헌신의 결과였고, 부산 시민과 유관기관 및 언론의 적극적인 성원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특히 창설부터 집행위원장 퇴임까지 15년간은 물론 그 뒤에도 한결같이 성원해준 고 강수연과 임권택·안성기·박정자·손숙·윤석화·노영심 등 여러분이 계셨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고 믿는다.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