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취하기보다 음미한다” 전통주·와인 즐기는 MZ세대
패러다임 바뀐 음주 문화
#대학생 박준현(27)씨는 최근 와인·위스키 동호회에 가입했다. 주 1회씩 다양한 종류의 와인과 위스키를 서로 가져온 뒤, 준비한 안주와 함께 페어링해서 음미한다. 위스키나 와인의 경우 가격도 비싸고 용량도 크다보니 혼자 먹기엔 부담이 크다. 하지만 동호회를 통하면 큰 부담없이 다양한 종류를 접할 수 있어 주머니가 가벼운 젊은 세대에게 인기다. 박씨는 “또래들과 함께 모여 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즐기다보면 삶이 좀더 풍부해지는 기분”이라며 “역사 깊고 유명한 와이너리나 제조장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술을 만든 나라의 문화, 지역 특색, 전통 등을 알게 되고, 단순히 술을 마시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느낄 때가 있다”고 전했다.
전통주 시장 6년 새 2배 넘게 성장
각 업계가 주목하고 있는 소비자층인 ‘MZ세대(밀레니얼+Z세대)’ 사이에서는 나에게 맞는 술, 즐길 수 있는 술 등 자신의 취향을 확연하게 보여 주는 술을 찾아 마시는 것이 당연하다는 문화가 자리잡았다. 온라인 몰 11번가에 따르면 2021년 20·30대의 전통주 구매량은 팬데믹 이전과 비교해 각각 63%, 78% 증가했다.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만든 ‘폭탄주’를 단번에 들이키는 회식 문화도 갈수록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직장인 이민정(35)씨는 “콜키지 프리(개인이 가져온 주류를 별도의 비용 없이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서비스) 식당을 찾아 각자 마시고 싶은 전통주나 와인을 가져와 안주와 함께 즐기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며 “회사 회식에서도 소맥을 취할때까지 먹기보다는 각자의 취향을 존중해 술을 즐기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이런 문화는 전통주 시장의 확대로 이어졌다. 2015년 408억8200만원이었던 전통주 시장의 규모는 2021년 954억6900만원으로 2배 이상 뛰었다. 또한 외식 프랜차이즈 전문 기업 더본코리아의 전통주 커뮤니티 ‘백술닷컴’이 2021년 자사 회원을 대상으로 분석한 전통주 소비 트렌드 분석에 따르면, 전통주를 구매하는 회원 중 20~30대 비율이 66%로 가장 높았다. 40대가 32%, 50대가 3%였다. 전통주 업계에서도 MZ세대를 주목하고 있다. ‘고흥 유자주’로 이름을 알린 ‘어떤하루’의 김다은 이사는 “과거보다 젊은 세대들이 전통주를 많이 찾는 것이 판매를 하다보면 체감된다”며 “직접 생산공장까지 와서 유자주를 사가는 2030 손님들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소주+맥주 ‘폭탄주’ 회식 드물어
위스키나 와인도 MZ세대들의 ‘즐기는 술’ 취향의 대상이다. 최근 유명 위스키의 경우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품귀 현상이 발생할 정도다. 지난 6일, 7일 진행한 이마트의 ‘신년 맞이 위스키 런데이’는 일명 ‘위스키 지도’로 2030 세대 사이에 퍼지며 몇몇 이마트 지점에는 오전 4시부터 문을 열 때까지 줄을 서 기다리는 ‘오픈런’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날 위스키 오픈런에 참여한 최유호(31)씨는 “인기가 많은 스코틀랜드산 발베니·맥켈란, 평이 좋은 일본산 히비키·야마자키 같은 싱글몰트 위스키를 마셔보고 싶었는데 구하기가 어려워 일찌감치 줄을 섰다”며 “몇몇 친구끼리 각기 다른 지점에서 오픈런을 한 뒤 나눠먹자는 계획을 세우는 지인들도 있었다”고 전했다.
2030세대가 위스키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학내일연구소가 발표한 ‘2022 MZ세 데이터 총결산’ 보고서에 따르면 MZ세대는 위스키에 대해 ‘성공한’ ‘어른들이 마시는’ ‘럭셔리한’ ‘전문적인’ 등의 키워드를 떠올렸다. 소셜미디어(SNS)를 즐겨하는 MZ세대는 위스키나 와인 등의 사진을 올리며 자신만의 이미지와 취향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최근 2030을 중심으로 시작된 하이볼 열풍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위스키에 탄산을 섞어 만드는 칵테일 하이볼이 유행하며 주 재료가 되는 가쿠빈 등 특정 위스키가 품귀 현상을 겪기도 했다. 대학원생 유경진(28)씨는 “코로나19로 인해 홈(Home)술을 하면서 나만의 레시피로 하이볼이나 칵테일을 만들게 됐다”며 “취향에 맞게 제조해서 마실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대형마트와 편의점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고 가격대도 다양한 와인 또한 꾸준히 MZ세대의 취향을 자극한다. 서울에서 와인바와 와인 동호회를 운영하고 있는 임현섭(37세)씨는 “젊은 세대는 와인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소믈리에 자격증에 도전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며 “단순히 화이트와 레드 정도로만 나누던 기성 세대와는 달리 이들은 레드와인만 해도 카베르네 쇼비뇽, 피노 누아, 메를로 같은 대표 품종은 물론 이탈리아의 산지오베제나 스페인의 템프라니요까지 다양한 나라, 다양한 와이너리의 다양한 품종을 구분해 즐긴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음주 문화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고 설명한다. 명욱 주류칼럼니스트는 “마시고 취하는 문화에서 술의 맛과 향을 음미하는 쪽으로 변하면서 주류 시장이 다양성이 높아지고 질적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맞이했다”고 말했다. 진로 소주, OB 맥주, 장수 막걸리만 들어있던 과거 수퍼마켓 냉장고와 수십 종의 소주·맥주·막걸리를 진열한 요즘 마트·편의점 냉장고를 비교해보면 실감이 날 것이다. 그는 “무작정 취하면 장땡이던 문화보다 건강하고 건전한 음주문화가 생기는 것은 주류 시장은 물론 사회 전반적으로도 고무적인 일”이라고 덧붙였다.
원동욱 기자 won.dong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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