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길을 잃다 [MD칼럼]
[정유이의 영화수필]
‘영웅’ 안중근 의사의 독립투쟁사는 가족사보다 더 꿰고 있는데, 저마다 어떤 기대를 하며 영화관으로 향했을까.
음악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희소한 한국 정통 뮤지컬영화임에 한 표를 던지고, 귀를 풍성하게 해줄 음악과 배우의 가창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도입부터 웅장하고 처절하다. 광활한 설원에 홀로 선 안중근 의사의 비장한 노래가 흐른다. 이어, 열 한 명의 동지들과 네 번째 손가락을 일제히 자르는 단지동맹 의식은 광휘롭고 장렬했다.
태극기에 붉게 새겨진 ‘대한독립’은 수 만 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을 글자였다. ‘그래, 애국은 이런 것이야’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아이가 엄마 말 잘 듣겠다고 조아리듯이.
원작과 역사적 사실을 오가며 재구성된 플롯과 가상 인물, 재창조된 실존 인물들의 진지한 연기에 조용히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관객석에서 웃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흔히 쓰는 연출기법으로 무거운 영화에도 적절한 환기와 재미를 위해 유머코드를 삽입하는데, 그것이 웃음의 원인이었다.
‘이 영화가 이렇게 가벼워도 될 일인가?’,‘혹시 난, 무거운 눈물의 카타르시스를 기대한 것일까?’ 올라가는 입꼬리에 힘을 주고, 자꾸만 죄를 짓는 것 같은 불편한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안중근 의사와 전장에도 뛰어들고, 거사를 계획하며 악전고투하는 독립군 역할의 조연배우들이, 특유의 익살로 종종 웃음을 유발한다. 서부활극 같은 분위기가 되는가 하면, 발랄한 노래에 오두방정 양념도 친다.
그들은 많은 영화에서 코믹한 캐릭터로 출연해, 등장만으로도 벌써 입꼬리가 올라가는지라 그런 모습과 중첩되는 것도 어찌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안중근 의사 역할의 주연배우는 가족과 영원한 이별일지 모를 상황과 피 마르는 거사를 앞두고도, 만두피 터지듯 웃음이 분출하게 만든다. 나는 확인할 길 없는 역사의 진실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위대한 영웅도 사람이기에, 중차대한 상황에서도 밝은 앞날을 생각하며 슬며시 새어 나오는 위트이지 않았을까. 아니 웃을만한 일도 있지 않았을까.
조국과 민족을 향한 대의를 짊어지고, 한 치의 방심을 허락지 않았을 그 날에도 낱알 같은 여유가 있었을까. 그랬을까, 그래야만 한다.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일순간 잠깐이라도 웃고 위안을 받고 싶을 때가 있지 않나.
위대한 인물들도 때때로 벼랑 끝에 선 위기에서, 무너지려는 의지를 가까스로 붙잡기도 했을 것이다. 그럴 때 의지한 것은 대의명분의 한 사람이자, 가까이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일 것이다.
영화처럼 영웅 주위에는 진중한 대의와 멀어 보이는 유쾌한 이들도 있고, 늘 핀잔만 하는 아내와 철모르는 아이들도 있다. 이들을 보며 의지를 굳건히 하고 큰일을 도모할 수 있었을 것이다. 큰 영웅에게는 어깨를 짓누르지 않는 작고 가벼운 영웅이 필요한지도.
때때로 사람을 무거운 사람과 가벼운 사람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무거움은 경외이고 가벼움은 경시일까. 배우‘찰리 채플린’은 가볍게 뒤뚱거리는 걸음걸이와 경망스러운 몸짓으로 코미디 배우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가 등장한 대부분 영화는, 어두운 현실을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통해 우회적이고 굴절된 형식으로 표현했다. 그의 외모 자체가 비극과 희극이 혼재하는 캐릭터였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복잡미묘한 상황과 뒤섞여 모호한 그의 표정이 인생의 축소판이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한 그의 명언은 역설할 수도 있다.
인생은 비극과 희극의 수많은 파편으로 이루어져 매 순간 무한한 반복이다. 저울처럼 무게 중심이 조금씩 달라질 뿐, 누구에게나 살아내기에 묵직한 삶을 비극과 희극으로 조각조각 나누는 의미가 있을까.
영화 속 영웅의 마지막 날 목에 밧줄이 걸리고, 수의를 전했던 일본인 교도관의 진중한 눈빛이 스치는 그 순간, 잠시 느꼈을 인간애에 가벼운 미소를 품고 있었을지도. 눈 감은 후에 볼 수 있을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생각하며 환히 웃고 싶었을지도. 영웅이라는 존재의 절대적 무거움 앞에서 가벼운 웃음에 대한 죄책감을 가졌던 내가 우습다.
영화 말미, 영웅의 노모가 써 내려가는 편지에 숨을 죽인다. 본능을 애써 감추며 개똥철학으로 삶의 진리를 찾고, 어설픈 비평을 하려는 나의 얕음을, 올라가는 체중계 숫자로 눌러본다.
*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전문위원 겸 수필가.
*이 글은 본사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진 =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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