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시작과 끝, 그 사이

2023. 1. 20.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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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개인에 펼쳐진 삶과 감정들
정확한 날짜대로 움직이지 않아
반복되는 하루 단 한번도 없듯
새 출발과 매듭 사이 일상 중요

음력 설날이 지나야 ‘정말로’ 신년이 시작한다고 말한다. 어릴 적에 나는 1월1일이 되면, 마치 자동차 마일리지 계기판에 숫자가 자동으로 넘어가듯, 사람의 나이가 저절로 한 살 더 많아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음력 설날이 되어 조부모님께 세배드리러 가면, ‘오늘 떡국 먹었으니 우리 손녀도 한 살 더 먹었구나’ 하는 말씀을 또 들었다. 나는 1월1일이 되면 나이가 한 살 늘어나지만, 진짜로 몸으로 나이를 먹으려면 설날에 꼭 떡국까지 먹어야 한다고 혼자 결론 내렸다.

요즘 어린이들은 나이를 매기는 것도 나라에서 ‘이렇게 하자’ 하고 정하기 나름이라는 걸 새삼 알게 됐을 것이다. 이제는 양력 1월1일 혹은 음력 설날에 전 국민이 한 살씩 일괄적으로 배부받는 일은 없다. 음식의 문화적 의미도 달라졌다. 떡국 대신 미역국이 나이 먹는 음식으로 등극했다고나 할까.
이주은 건국대 교수 미술사
한 해의 시작을 1월 첫날로 삼아도 되고 음력 설날 직후로 받아들여도 좋다. 하지만 어떤 약속이 끝나는 날짜가 모호하다면 어떻게 될까? 최근에 신문 기사를 통해 어느 골프장이 땅주인과 법정에서 다투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분쟁의 이유는 한참 전에 쌍방이 맺은 계약서의 문구로 인한 것이다. 언젠가는 공항 활주로로 쓰게 될 유휴지를 당분간 골프장으로 사용하도록 허가했는데, 그 종료일이 “활주로를 건설하는 2020년 12월31일”까지라고 명시된 것이다.

아마도 계약 당시에는 활주로의 건설 날짜와 2020년 12월31일을 엮는 것이 너무도 당연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20년 가까이 시간이 흘러가고, 새 활주로의 착공이 미뤄지는 까닭에, 이래저래 상황이 바뀌고 맥락이 달라져서 두 항목이 별개가 된 듯하다.

약속 날짜 앞에 무슨 조건이 붙으면 의미가 그리 명쾌하지 않다. 예를 들어, ‘우리 형이 내 돈 갚는 금요일에 입금할게’, ‘직장을 옮기게 될 올해 말에 이사 갈 겁니다’, ‘합격 결과 나오는 2월에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자’. 과연 돈이 송금될지, 정말로 이사를 오겠다는 것인지, 결혼할 의사가 있기는 한지, 모두 불확실하게 들린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상태가 조건으로 붙으면 더 애매해진다. 가령 당신의 연인이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내년 5월1일까지 사귀는 걸로 하자’라고 한다면 어떨까? 사람의 감정에도 마치 과일 통조림에 제조일과 유효기한이 정해져 있듯 시작과 끝을 설정할 수 있을까? 왕가위 감독의 1994년 영화 ‘중경삼림’에 그런 내용이 잠시 다뤄졌다.

남자 주인공은 4월1일 만우절에 장난치듯 이별을 통보한 여자친구의 진심을 도무지 알 수 없어, 딱 한 달만 기다려보기로 한다. 그날이 5월1일이다. 5월1일을 종결의 날로 지정하여 그날까지만 그녀를 생각하고, 이후부터는 완전히 마음 밖으로 내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남자는 하루하루 달력의 날짜를 지워나가는데, 그가 날짜를 끝장내는 방식은 이랬다. 집 앞 편의점에서 당일 날짜로 유효기간이 찍힌 통조림을 사들여 먹어 없애는 것이다.

스스로 정한 사랑의 끝이 몇 시간 남지 않은 4월30일 밤에 남자는 서른 개나 되는 파인애플 통조림을 억지로 입에 쑤셔 넣는다. 모두 유통기한이 5월1일자로 표기된 것들이다. 여자친구가 좋아하던 파인애플은 그녀를 기억하게 하는 과일이지만, 이제 그 기억은 유효기간이 지났음을 스스로 확인하는 행동이리라. 여자와의 추억도 빈 깡통이 되어 쓰레기통에 던져질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맞이하게 되는 여러 시작과 끝은 통조림 유통기한처럼 정확한 날짜가 적혀 있지는 않다. 새로운 출발을 결심하고 매듭짓는 것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다. 계약서를 쓸 때는 시작과 끝을 오해의 소지 없이 분명하게 써야 하겠지만, 실제 삶에서는 계약서에 쓰이지 않는 일상적인 날들이 더 의미심장할 수도 있다. 시작과 끝의 ‘사이’ 말이다. 개별 삶이 어떤 향기를 품게 될 것인가는 사이의 숱한 날짜들을 어떻게 지속했는가에 달려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였던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가 ‘두 번은 없다’라는 시에서 읊듯, 세상이라는 곳에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이주은 건국대 교수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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