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시작과 끝, 그 사이
정확한 날짜대로 움직이지 않아
반복되는 하루 단 한번도 없듯
새 출발과 매듭 사이 일상 중요
음력 설날이 지나야 ‘정말로’ 신년이 시작한다고 말한다. 어릴 적에 나는 1월1일이 되면, 마치 자동차 마일리지 계기판에 숫자가 자동으로 넘어가듯, 사람의 나이가 저절로 한 살 더 많아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음력 설날이 되어 조부모님께 세배드리러 가면, ‘오늘 떡국 먹었으니 우리 손녀도 한 살 더 먹었구나’ 하는 말씀을 또 들었다. 나는 1월1일이 되면 나이가 한 살 늘어나지만, 진짜로 몸으로 나이를 먹으려면 설날에 꼭 떡국까지 먹어야 한다고 혼자 결론 내렸다.
아마도 계약 당시에는 활주로의 건설 날짜와 2020년 12월31일을 엮는 것이 너무도 당연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20년 가까이 시간이 흘러가고, 새 활주로의 착공이 미뤄지는 까닭에, 이래저래 상황이 바뀌고 맥락이 달라져서 두 항목이 별개가 된 듯하다.
약속 날짜 앞에 무슨 조건이 붙으면 의미가 그리 명쾌하지 않다. 예를 들어, ‘우리 형이 내 돈 갚는 금요일에 입금할게’, ‘직장을 옮기게 될 올해 말에 이사 갈 겁니다’, ‘합격 결과 나오는 2월에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자’. 과연 돈이 송금될지, 정말로 이사를 오겠다는 것인지, 결혼할 의사가 있기는 한지, 모두 불확실하게 들린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상태가 조건으로 붙으면 더 애매해진다. 가령 당신의 연인이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내년 5월1일까지 사귀는 걸로 하자’라고 한다면 어떨까? 사람의 감정에도 마치 과일 통조림에 제조일과 유효기한이 정해져 있듯 시작과 끝을 설정할 수 있을까? 왕가위 감독의 1994년 영화 ‘중경삼림’에 그런 내용이 잠시 다뤄졌다.
남자 주인공은 4월1일 만우절에 장난치듯 이별을 통보한 여자친구의 진심을 도무지 알 수 없어, 딱 한 달만 기다려보기로 한다. 그날이 5월1일이다. 5월1일을 종결의 날로 지정하여 그날까지만 그녀를 생각하고, 이후부터는 완전히 마음 밖으로 내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남자는 하루하루 달력의 날짜를 지워나가는데, 그가 날짜를 끝장내는 방식은 이랬다. 집 앞 편의점에서 당일 날짜로 유효기간이 찍힌 통조림을 사들여 먹어 없애는 것이다.
스스로 정한 사랑의 끝이 몇 시간 남지 않은 4월30일 밤에 남자는 서른 개나 되는 파인애플 통조림을 억지로 입에 쑤셔 넣는다. 모두 유통기한이 5월1일자로 표기된 것들이다. 여자친구가 좋아하던 파인애플은 그녀를 기억하게 하는 과일이지만, 이제 그 기억은 유효기간이 지났음을 스스로 확인하는 행동이리라. 여자와의 추억도 빈 깡통이 되어 쓰레기통에 던져질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맞이하게 되는 여러 시작과 끝은 통조림 유통기한처럼 정확한 날짜가 적혀 있지는 않다. 새로운 출발을 결심하고 매듭짓는 것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다. 계약서를 쓸 때는 시작과 끝을 오해의 소지 없이 분명하게 써야 하겠지만, 실제 삶에서는 계약서에 쓰이지 않는 일상적인 날들이 더 의미심장할 수도 있다. 시작과 끝의 ‘사이’ 말이다. 개별 삶이 어떤 향기를 품게 될 것인가는 사이의 숱한 날짜들을 어떻게 지속했는가에 달려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였던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가 ‘두 번은 없다’라는 시에서 읊듯, 세상이라는 곳에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이주은 건국대 교수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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