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가 삐뚤어도, 맞춤법이 틀려도…딱 보면 알아요, 아들딸 얼마나 사랑하는지[설 특집]
충주 열린학교 한글 문해교육 수업시간
할머니들, 자녀들에게 손 편지 직접 써
“사랑해, 고마워…새해 복 많이 받으렴”
엄마의 따뜻한 마음 꾹꾹 눌러 담아
글 쓸 줄 모르던 시절 ‘외국인’이냐고
핀잔도 들었지만 지금은 ‘시’로 수상
지난 17일 오전 충북 충주열린학교 한글 문해교육에서 진행된 편지쓰기 수업. 2년 넘게 이 학교에서 한글을 배운 김기순 할머니(82)가 연필을 꼭 쥐고 한 자씩 힘줘 편지를 써 내려갔다.
평생 함께했던 남편을 지난해 하늘로 떠나보낸 김 할머니는 올해 설, 남편 없이 딸 둘과 아들 하나 자식 셋을 맞이해야 한다. 남편의 빈자리가 크다. 그래서 더 서글프기만 하다.
김 할머니의 편지에는 세상을 떠난 남편 이야기를 일부러 넣지 않았다. 멀리 사는 세 남매를 생각해서다. 그는 “남편의 빈자리가 크지만 내가 슬퍼하면 자녀들이 더 힘들어한다. 아픈 것도 내색하면 안 된다”며 “내가 건강하고 잘 지내야 자녀들이 즐거워한다”고 했다.
이 편지는 전날 문해교육 시간 숙제였던 ‘자녀들에게 보내는 편지’다.
이 학교에서 한글을 깨친 양순자 할머니(75)는 전날 연습장에 써놨던 편지를 책상에 올려놓으며 부끄러워했다. 한글 선생님이 맞춤법을 고쳐준 듯 빨간색 글씨가 가득했다.
“올해 행운이 가덕(득)하소. 새해를 맞이하여 사랑(하는) 내 아들들아 힘들지 올해는 (가)득히 건강하(렴) 정말 정말 고마워 올해는 화이팅(!) 항(상) 감사하구나. 사랑하는 내 며느리님! 황(항)상 감사(하구나) 사랑(하는) 우리 공주님들 올해 건강하게 잘(커줘서) 고마워. 멋진 사위 힘들지 새해는 행운이 가득하길 바라네 사랑(하는) 내 딸. 소중한 딸 바쁘게 직장 생활 하면서 엄마에게 신경 써줘서 정말 고마워.”
경북 울진 출신인 양 할머니는 어릴 때 집안을 책임지던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가세가 기울어 한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했다.
“목행동에 사는데 ‘목’자는 알았는데 ‘행’자를 몰라 동사무소 직원들이 대신 써줬지.”
양 할머니의 소원은 하늘나라에 있는 남편에게 “만리장성같이 긴 편지를 쓰는 것”이다. 남편은 2018년 3·1절,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거실 소파에서 잠든 신랑이 일어나지 않았어. 몸이 차가웠어요. 글씨를 더 열심히 배워 예쁘게 ‘왜 손 한번 안 잡아 주고 나를 버리고 갔냐’고 편지를 보내고 싶어.” 양 할머니는 “ ‘여보 나 이제 글씨 쓸 줄 알아’라고도 말해주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유춘자 할머니(83)는 자신을 돌봐주는 50대 막내딸에 대한 미안함을 편지에 가득 담았다.
“엄마가 늘 걱정을 하게 해서 미안하구나 사고로 몸을 다쳐 내 몸도 내 맘대로 할 수 없게 되어서 서글픈 생각이 들어서 한숨만 나는구나. (중략) 사랑하는 딸과 사위 모두 올해는 하는 일들 대박 나길 바라네 새해 복 많이 받으렴. 엄마가 병원에 있을 때에 우리 딸이 제일 고생이 많았구나 진심으로 고맙구나.”
어린 시절 오빠들을 따라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결혼해 친정에 편지질만 한다’며 부모님은 다니지 못하게 했다. 3년 전 막내딸이 동네를 수소문해 학교에 보내줘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받침은 아직 서투르다.
오순매 할머니(66)는 글씨를 쓸 줄 모르던 때 ‘외국인이냐’고 핀잔을 들었던 기억을 털어놨다.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남편 면회를 하려면 주소를 써야 했는데 글을 몰라 쓸 수 없었던 것이다.
“간호사에게 부탁했는데 거절하면서 ‘외국인이냐?’고 묻더라고.”
이 사연을 시로 쓴 오 할머니는 지난해 9월 ‘전국 성인문해 교육 시화전’에서 상을 받았다. 초등학교 2학년과 유치원생인 손자들에게 “게임 좀 그만하고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도 쓴 오 할머니는 “글을 배우고 손자, 딸, 남편과 문자로 대화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2005년 개교한 충주열린학교에서는 매년 300여명의 고령층이 한글과 영어, 컴퓨터 등을 배우고 있다. 정진숙 교장은 “어르신들의 손편지에 사랑을 전하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며 “고령에도 도전하는 일을 응원한다”고 말했다.
이삭 기자 isak84@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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