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기 들고, 이웃 깨우고… 구룡마을 세 의인 덕에 인명피해 막았다
설 연휴를 하루 앞둔 20일 오전 6시 27분쯤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큰불이 나 집 60여 채를 태우고 5시간 20분 만에 완전히 꺼졌다. 서울 강남의 마지막 판자촌인 구룡마을은 노인과 저소득층 등 665가구가 모여 사는 곳이다. 상당수 사람들이 아직 잠자리에 있었을 시간에 불이 났지만 인명 피해는 없었다. 불이 난 것을 보고 서둘러 대피하는 대신, 이웃 주민들을 구하러 나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민 신명근(60)씨는 자기 가족들을 피신시킨 뒤 마을에 남아 치매 노인과 거동이 불편한 주민들의 집 문을 두드리며 이들을 직접 깨웠다. 소방차가 화재 지점까지 갈 수 있도록 도로변에 주차된 차량 주인에게 전화를 돌리기도 했다. 신씨는 “주변 집 수십 곳을 다 두드리며 “불이야” 외쳤는데, 움직이기 힘든 분들이 먼저 걱정이 되더라”고 했다. 주민 조항춘(80)씨 역시 비슷한 시각 마을 곳곳을 돌며 이웃들을 깨워 집 밖으로 빠져나오게 했다. 택시 운전사인 노순표(75)씨는 이날 새벽 5시까지 근무하다 집에 들어온 후 불이 난 걸 알게 됐다. 노씨는 불길이 빨리 번지지 않게 하려고 불이 난 곳으로 가서 소화기 8개를 다 쓸 때까지 직접 불길 잡기에 나섰다고 한다.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작년 여름 수해로 집이 망가졌던 이들이 이번엔 설을 코앞에 두고 화재로 살 곳을 잃게 됐다. 구룡마을에 33년째 살고 있다는 지흥수(78)씨는 “여름엔 수해로 집이 떠내려간 주민이 있고, 겨울엔 내 집이 홀랑 다 탔다. 이 와중에 설날이 무슨 소용이겠나”라고 했다. 집과 교회가 모두 타버린 장원식(73) 안디옥 교회 목사는 “작년 물난리로 바닥 곰팡이 청소 겨우 해놓으니 모두 타 없어져버렸다”며 “올해는 무리해서 김치도 많이 담갔는데, 살림이고 가족 사진이고 아무것도 못 챙겨 나왔다”고 했다.
강남구는 피해 주민을 위해 인근 호텔을 빌려 임시 거주지를 마련했다. 지낼 곳이 없어진 주민 40여 명이 오전 10시쯤 구청 측이 준비한 버스를 타고 이곳으로 향했다. 지팡이를 짚고 부축을 받는 할머니,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나온 노인 등이었다. 버스에 올라탄 주민 중 가방을 챙겨 나온 사람은 절반도 안 됐다. “애들 세뱃돈 뽑아놨는데 하나도 못 챙겼다”며 한숨을 내쉬는 사람도 있었다.
구룡마을은 건물 대부분이 비닐이나 합판 등 불에 잘 타는 소재로 만들어져 특히 화재에 취약하다. 2013년부터 이번 화재까지 10년 동안 21번이나 불이 났다. 건물이 촘촘히 붙어 있어 불길이 번지기 쉽고, 소방차 등의 진입이 어려워 불을 제때 끄기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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