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반 위의 구도자이자 윤정희의 구도자’···윤정희 남편, 백건우
"순수하고 착한 사람···내가 생각하던 남자"
문화계 대표 ‘잉꼬부부’···50년 가까이 함께
배우 윤정희(본명 손미자) 씨가 향년 79세로 별세했다. 19일(현지시간) 윤정희 씨는 프랑스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알츠하이머 투병 중이었다.
"제가 생각했던 남자를 찾은 것 같아요. 예술을 하는 순수하고 착한 사람. 제가 럭키한(행복한) 것 같아요."
윤정희 씨가 생전에 남긴 남편 백건우(77)에 대한 인터뷰가 주목을 받고 있다. 윤정희는 남편을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라고 자주 말하곤 했다.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서 주연을 한 것을 계기로 당시 인기 예능프로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는 그런 사람을 만나 행복하다고 고백했다.
백건우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음악세계로 ‘건반 위의 구도자’라고 불린다. 그런 백건우가 윤정희에게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기 전에 다정한 남편이자 친구였다.
윤정희는 독일 뮌헨에서 1972년 백건우를 처음 만났을 당시 자신에게 말없이 꽃 한 송이를 건네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제 남편이 너무 말이 없었어요. 다른 유학생들은 맥주 마시고 그러는데, 꽃 파는 남자에게 꽃을 딱 사 가지고, 그 말 한마디도 없던 사람이 나를 주는 거예요. 평생 그렇게 꽃은 처음 받아봤어요."
그 후 말 수 없고 수줍음 많던 청년은 윤정희의 평생의 동반자가 되어 묵묵히 그 옆을 지켜왔다.
백건우·윤정희 부부가 오랫동안 거주해온 프랑스 파리의 교민 사회에서는 부부가 늘 손을 잡고 다니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에 따르면 이미 윤정희의 알츠하이머가 어느 정도 진행됐을 무렵이었는데, 윤정희는 백건우의 연주회 때면 늘 객석의 구석 한편에서 남편의 음악에 말없이 빠져들곤 했다고 한다.
윤정희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전성기 1976년에 백건우와의 결혼을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백건우는 미국의 명문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공부하고 1969년 부조니 콩쿠르 특별상, 1971년 나움부르크 콩쿠르 우승 등의 경력이 있었지만,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윤정희에 비해서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1972년 독일 뮌헨 올림픽 문화행사에서 처음 만났던 두 사람은 2년 뒤 프랑스 파리의 한 한국음식점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운명 같은 사랑을 시작하고 2년 뒤 결혼에 골인한다.
소박한 부부의 품성에 따라 결혼식은 이응로 화백 집에서 조촐하게 치러졌다. 혼수도 없었고 부모도 참석하지 못했다. 예복으로는 윤정희 모친이 보내준 전통 한복을 입었다. 신혼생활도 검소했다. 백건우는 돈보다 음악적 수련을 중요시했다. 윤정희가 한국에서 벌었던 돈은 송금 제한 등으로 인해 현지에 보내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부부는 늘 이 때를 행복한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은막의 스타'와 전도유망한 피아니스트의 결혼은 당대 최고의 로맨스로 두고두고 회자했고 이후 둘은 50년 가까이 함께하며 문화계의 대표적인 '잉꼬부부'로 부러움을 샀다.
백건우는 윤정희 생전에 아내가 영화배우라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하곤 했다.
윤정희의 마지막 작품은 2010년 영화 '시'(감독 이창동)다. 홀로 손자를 키우며 늦은 나이에 시를 배우는 할머니 '미자'를 연기했다.
당시 백건우도 마침 도이치그라모폰에서 브람스 신보를 발매한 참이었다. 신보 발매를 알리는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시'에 대해 "영화에 윤정희의 성격이 많이 투영됐다. 이 감독이 너무나 정확히 인간 윤정희를 꿰뚫어 본 것 같아 놀랐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극 중 '미자'는 실제의 '손미자'처럼 알츠하이머병을 앓으며 서서히 언어와 기억을 잃어간다. ‘미자’는 윤정희의 본명(손미자)이기도 하다. 이창동 감독이 처음부터 윤정희를 염두에 두고 쓴 작품으로 알려졌다.
영화 대부분의 장면에 그녀가 나왔다. 이 영화로 국내 영화 시상식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칸 영화제에서 레드카펫을 밟았고, LA 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도 받았다. 2011년엔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Officier dans l'ordre des Arts et Lettres)도 받았다.
윤정희는 연기 활동과 더불어 백건우의 아내로서 내조 역할에도 충실했다. 연주회나 간담회 자리 뿐 만 아니라 모든 자리에 함께 했다. 2016년 7월 뇌졸중을 이겼으나 언어 능력을 잃은 김승옥의 수채화 전시에도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2018년 11월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주최로 '제38회 영평상' 시상식에서 윤정희가 공로영화인상을 받을 때도 함께 했다.
백건우는 2017년 간담회 당시 윤정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제게 가장 엄한 평론가이고 제 음악생활에서 정말 중요한 사람이다." 백건우는 윤정희가 알츠하이머병이 깊어진 뒤 홀로 투어를 다니는 가운데도 내내 아내만 생각했다고 한다.
백건우는 클래식음악계에서 '사랑꾼'으로 유명했다. 인사동 길을 걷을 때 백건우는 윤정희의 가방을 들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윤정희는 건반 위의 구도자로서 고독할 수밖에 없는 백건우 작업의 동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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