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한국판 '필라델피아의 기적' 보고 싶다
격렬한 논쟁 끝에 타협점 찾은 집단지성
선거개혁도 기득권 포기와 타협 정신 필요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21대 총선을 1년 반 정도 앞둔 2018년 가을에도 정치개혁 열망은 지금 못지않았다. 거대 양당의 승자독식과 무한정쟁으로 정치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걱정이 넘쳐났다. 논의의 물꼬가 트인 건 의외의 장소였다.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에 따라간 더불어민주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등 3당 대표들이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바꾸기로 의견을 모았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각 정당 득표율에 맞춰 의석수를 할당한 뒤, 배분한 의석수보다 지역구 당선자가 부족한 경우 비례대표 의석으로 채우는 방식이다. 당시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는 ‘제2의 평양합의’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집권여당이던 민주당이 방향을 틀자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골자로 한 선거법 개정안은 이듬해 12월 말 통과됐다. 하지만 결과는 익히 아는 대로다. 제1 야당의 반대 속에 패스트트랙으로 통과된 선거법은 졸속 시비와 불복 논란을 가져왔다. 연동률을 적용하는 비례대표 의석은 고작 30석으로 쪼그라들었다. 모델이 됐던 독일의 비례대표는 299석이다. 거대 양당은 그마저도 남 주기 아깝다며 비례대표 의석만 노린 위성정당을 창당해 제도를 무력화시켰다. '제2의 평양합의'라는 말이 무색하게 기득권의 벽은 강고하고 탐욕은 고래 힘줄만큼이나 질겼다.
내년 22대 총선을 앞두고 여의도에 다시 정치개혁 바람이 불고 있다. 이번에는 다를까. 솔직히 장담하기 어렵다. 지금도 공개석상에선 선거제 개혁을 목청 높여 외치지만, 카메라가 꺼지면 핑계와 변명이 먼저 나온다. 선거제 개혁은 같은 당 내에서도 지역과 선수에 따라 의원마다 입장이 갈리고, 지역구도에 기반을 둔 여야도 셈법이 다를 수밖에 없다. 상대가 위성정당 반칙을 구사하면 우리도 가만있을 수 없다는 ‘게임의 논리’도 여전하다.
“어차피 안 된다”는 회의론을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정치성향이 다르면 밥도 먹기 싫다’는 세상이다. 최근엔 정당마저 팬덤에 사로잡히면서 상황은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마냥 늦출 일이 아니다. 물론 명분이 있다고 좋은 결과가 뒤따르는 것은 아니다. 비례성과 대표성을 높인다며 죽이 맞는 정당들만 모여 게임의 룰을 바꾸고 밀실에서 졸속으로 논의하다 파국으로 끝난 지난 선거법 개정도 그런 경우다.
1787년 미국 정부의 틀을 짜기 위해 필라델피아에 모인 ‘건국의 아버지들’은 달랐다. 영국에서 독립한 12개 주 대표 55명이 제헌회의에 모였다. 그때도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무역, 세금, 노예제 등 각 주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갈렸다. 그럼에도 55명은 넉 달 동안 방에 틀어박혀 매주 엿새씩 머리를 맞댔다. 그렇게 집단지성이 만들어낸 미국 헌법은 ‘필라델피아의 기적’이라고 불렸다. 그 성공 비결을 ‘제임스 매디슨: 미국 최초의 정치가’의 저자 제이 코스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들은 학식과 실용주의를 겸비한 대단히 유능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면서도 타협할 준비가 돼 있었다. 사사건건 부딪쳤지만 격렬한 논쟁 끝에 타협점을 찾았다. 집에 돌아가 비난만 하면 편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그들이 필라델피아에 남기로 한 건 반드시 일을 성사시켜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선거제도를 바꾸려면 타협과 양보가 필수다. 특히 중대선거구제까지 화두에 오르면서 선거제 개혁은 복잡한 고차방정식이 됐다. 밀실에서 예산안·법안 타결하듯, 시간에 쫓겨 뚝딱 결과물을 내는 방식으로는 역부족이다. 무엇보다 기득권을 내려놓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자기 살을 베는 아픔 없이 얻을 수 있는 개혁은 없다.
현실론도 더러 나온다. 차기 총선 전에 선거법을 처리하되 적용은 차차기 총선부터 하자는 얘기다. 미국은 헌법도 넉 달 만에 만들었다. 결국 의지의 문제 아닌가 싶다. 책임감 있고 유능한 정치인들이 더 많이 나서 한국판 '필라델피아의 기적'을 만들어줬으면 한다.
김영화 정치부장 yaa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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