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를 꿈꾸던 딸에게...엄마가 보내는 편지

홍여진 2023. 1. 20. 17:3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노류영 씨 어머니 정미진 씨 인터뷰

‘어디고?’, ‘혹시 이태원은 아니제?’
2022년 10월 30일 오전 8시 47분. 엄마는 다급하게 딸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딸은 답하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딸은 엄마의 전화를 받을 수도, 카카오톡 메시지를 읽을 수도 없는 곳으로 가 버렸다. 하지만 엄마는 지금도 종종 딸에게 카카오톡을 보낸다. 카카오톡 메시지의 첫 줄은 대부분 ‘사랑하는 내 딸 류영아’로 시작한다. 딸을 찾던 엄마의 문자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 딸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로 바뀌었다. 엄마의 삶도 이태원 참사 이후로 완전히 바뀌었다.

뉴스타파는 지난 12월 19일,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노류영(28) 씨의 어머니 정미진(52) 씨를 그의 일터인 부산의 미용실에서 만났다. 정미진 씨는 “정부가 유가족에게 할 만큼 다 해줬는데, 왜 들고 일어나느냐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사실을 제대로 알리고 싶어서” 인터뷰에 나섰다고 말했다.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노류영 씨

간호사를 꿈꾸던 늦깎이 대학생 류영의 그날

‘11월 10일 해부학 깜지’, ‘11월 16일 생명윤리 리포트’, ‘11월 24일 간호윤리 리포트’
류영 씨의 카카오톡 프로필에는 온통 학교 과제와 관련된 일정이 적혀 있다. 류영 씨는 스물여덟 살이 된 지난해 대학에 입학한 늦깎이 신입생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간호조무사로 일하다 지난해 간호사가 되기로 마음 먹고 목포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뒤늦게 하고 싶었던 공부를 시작한 류영 씨는 대학생활 하루하루를 행복해했다고 한다.

딸이 어느 날 ‘엄마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돼?’라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행복해도 돼. 열심히 공부하면 돼. 4년만 우리 고생하자’ 이렇게 답해줬어요.
그런데, 그렇게 행복해 했던 대학 생활을 1년도 해보지 못 하고 갔네요.
- 정미진 / 고 노류영 씨 어머니

이태원 참사 당일은 류영 씨가 중간고사를 마치고, 오랜만에 친구와 서울에 갔던 날이었다. 11월에 다가올 빡빡한 학교 일정을 앞두고 숨 고르기를 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날 이태원에서 류영 씨의 시간은 멈춰버렸다. 

엄마 정미진 씨는 딸 류영 씨가 참사 당일 이태원에 간 줄 몰랐다. 참사 다음 날 아침 8시 30분경, 미용실에 이른 예약 손님이 있어 일찍 출근했고, 여느 때처럼 일한 뒤 손님을 보내고 TV를 켰다. TV에선 이태원에서 사고가 났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딸에게 연락했다. 전화하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그때부터 불안해졌다. 온 가족이 류영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른 통에 가까운 전화 끝에 한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용산경찰서 경찰이었다. 

류영 씨가 지난 10월 30일 아침 딸에게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

하지만 딸의 전화를 받은 경찰은 아는 게 없었다. 딸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살았다면 어느 병원에 입원해 있는지, 죽었다면 또 어느 병원에 안치돼 있는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경찰한테 왜 우리 딸 전화가 거기 있냐 그러니까 ‘이태원 현장에서 습득해서 왔다’(고 해요.) ‘그럼 우리 아이는 어떻게 됐노?’ 물으니까 ‘모른다, 일단 실종 신고부터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면 실종 신고를 어디로 해야 되냐'고 하니까 전화번호 하나 주더라구요. 거기 전화하니까 또 전화가 안 되더라고요. 나중에 실종자 접수 센터와 연결이 돼서 실종자 신고를 하고, 그때부터 딸을 찾기 시작했죠.
- 정미진 / 고 노류영 씨 어머니

혼돈의 ‘21시간’ 그리고 국가의 거짓말

엄마가 딸을 찾아 헤매던 10월 30일 오전 10시경, TV에선 사망자가 서울 경기 지역 병원 약 40곳에 안치돼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두 시간 뒤인 낮 12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브리핑에서 “전체 사망자 중 외국인과 미성년자를 제외하고는 151명 가량의 신원파악이 완료됐다”고 발표했다. 이후 국무조정실은 “서울시가 시신이 이송된 병원별로 전담공무원을 배치해 사망자 인적사항을 파악해 유족에게 안내하고 있다. 사상자가 타 병원으로 이송될 경우에도 유족에게 안내하고 있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이태원 참사 다음날인 지난해 10월 30일 오전 10시, 국무총리실이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 결과라며 배포한 보도자료 내용.

류영 씨는 신원 확인이 어려운 외국인도 미성년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류영 씨의 신원을 확인해 행방을 알려 준 정부 관계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경찰은 류영 씨 가족이 연락하기 전까지는 먼저 연락을 주지 않았다. 정부 발표 내용은 류영 씨 가족에게는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경찰이 알려준 건 이태원 참사 실종자 접수 센터 연락처 뿐이었다. 그때도 엄마는 류영 씨가 세상을 떠난 걸 알지 못했다. 

온 가족이 그 때부터 류영 씨를 찾아 나섰다. 부산에 있던 엄마를 대신해 수원에 있던 류영 씨의 삼촌이 조카와 함께 서울 경기 지역 병원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 류영 씨의 이모는 병원 수십 군데에 전화를 걸어 류영 씨가 있는지 확인했다. 그 어디에도 류영 씨는 없었다. 이모가 다시 용산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류영 씨의 행방을 물었다. 뒤늦게 경찰은 류영 씨가 경기도 평촌의 한림대병원에 있다고 알려줬다.

류영 씨의 삼촌이 곧바로 평촌으로 향했다. 삼촌이 가는 길에 이모가 병원에 전화를 걸어 류영 씨가 그곳에 있는지 확인했다. 병원에서는 당황스러운 답변이 돌아왔다. 류영 씨가 한림대병원에 없다는 것이었다. 

제 동생이 그 병원에 전화를 하니까 류영이가 또 거기에 없다는 거예요. ‘아니, 무슨 소리냐, (경찰이) 여기 있다고 했는데, 그럼 애가 어디로 갔냐’ 그러니까 (병원에서) ‘오지도 않은 시신을 우리 보고 물어보면 어떡하냐’고 그렇게 얘기를 하더래요. 그래서 동생이 ‘지금 이태원에서 애들이 다 죽고 사라졌는데,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냐’고 병원 관계자에게 막 다 그치니까 그제서야 ‘(병원) 앞에 여자 시신 2구가 왔었는데 자리가 없어 가지고 안양의 요양병원으로 보냈다’고 하더라고요.
- 정미진 / 고 노류영 씨 어머니

경찰이 알려준 병원에는 딸이 없었다

류영 씨는 병원 관계자의 말대로 요양병원인 안양샘 병원에 있었다. 엄마는 저녁 7시가 되어서야 딸을 병원 안치실에서 만날 수 있었다. 딸의 얼굴은 알아보기 어려웠다. 누군가가 물감을 뿌려놓은 듯 얼굴 전체에 멍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몸에 있는 타투를 보고 류영 씨임을 알아봤다. 류영 씨가 맞다는 걸 확인한 엄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류영 씨는 언제 어떻게 사망해 이태원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안양의 요양병원까지 오게 된 걸까. 이 경로에 대해선 아직까지 그 누구도 류영 씨 가족에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엄마가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정신 없는 통에 엄마가 받아 든 시체검안서에는 딸이 10월 29일 오후 10시 15분 ‘이전’에 ‘해밀톤 관광호텔 인근 노상’에서 사망했다고 적혀 있었다. 

류영 씨의 시체검안서에는 정부가 발표한 참사 발생 시각인 10월 29일 오후 10시 15분 이전에 류영 씨가 사망했다고 돼 있다.

시체검안서대로라면, 류영 씨는 정부가 발표한 이태원 참사 발생 시점에 바로 사망했다. 그런데 엄마가 딸의 사망 사실을 확인하고, 안치실에서 만나기까지는 무려 21시간이 걸렸다. 그 과정에서 정부는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  

아이가 죽고 땅바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 어떠한 연락도, 전화도 한 통도 주지 않았고요. 참사 다음날 가까스로 전화 연결이 된 경찰도 딸의 행방을 모른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닌 거 같아요. 나중에 장례 치르고 딸 유류품 찾으러 가서 알았는데, 참사 당일 우리 영이 휴대폰과 신분증, 카드 지갑은 경찰서에서 갖고 있었어요. 충분히 신원 파악이 가능했다는 건데 우리한테 쉬쉬하고 안 가르쳐 준 거였어요. 그러면서 우리는 애 찾으러 사방팔방 다 다녔고... 거기서부터 잘못된 것 같아요.
- 정미진 / 고 노류영 씨 어머니

류영 씨 가족은 딸을 21시간 만에 찾고도 바로 장례를 치를 수 없었다. 병원에 온 경찰은 딸이 압사로 사망했다고 간단히 설명한 뒤, 자세한 사망 경위를 알려면 부검을 하거나 수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류영 씨 사건은 서울에서 부산 사상경찰서로 이관돼 있었다. 사상경찰서의 경찰은 류영 씨 가족이 이의제기하면 다시 서울로 사건을 올려 보내는 절차가 필요해 수사에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장례도 치를 수 없다고 했다. 

딸이 어떻게 사망했는지 그 경로를 전혀 알 수 없던 아빠는 수사를 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딸을 계속 차가운 안치실에 넣어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딸의 죽음에는 의문이 가득했지만 결국 아빠는 경찰서에 가서 이의제기하지 않는다는 진술서를 썼다. 그리고 나서야 딸의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참사 이후에도 정부 발표가 지켜진 건 거의 없었다. 정부는 1대1 전담 공무원을 지정해 유가족 지원에 총력을 다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정미진 씨가 공무원의 연락을 받은 건 딸의 장례를 치른 다음 날, 정부가 지원하는 장례비 관련 서류에 빨리 서명하라는 독촉뿐이었다고 했다. 엄마는 자신과 연결된 1대1 전담 공무원이 누구인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최소한의 예의도 없었던 ‘국가의 애도’

엄마 정미진 씨가 진정으로 정부에 바랐던 건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대통령의 진심 어린 사과와 정부의 책임 있는 자세였다. 하지만 정부의 태도는 그 반대였다. 참사 직후 재난 안전 대응 주무 부처인 행정안전부 이상민 장관은 “주최자가 없는 행사라서”, “예년과 달리 이태원에 많은 인파가 모인 게 아니라서” 정부가 미리 막을 수 있었던 참사가 아니라는 취지로 말했다. 엄마에게는 "국가는 이태원 참사에 책임이 없다"는 말로 들렸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에 쓰러져 있던 윤석열 대통령 화환 (출처 :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은 참사 직후 국가 애도의 날을 선포하고, 희생자 장례식장에 대통령 명의의 근조 화환을 보냈다. 하지만 엄마 정미진 씨는 이런 정부의 조치에도 아무런 위로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오히려 분노만 커졌다고 했다.

희생자 사진도 한 장 없고, 위패도 하나 없는 합동 분향소를 설치해 놓고 대체 어디에다 애도를 표한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평상시 집에서 제사를 지내도 지방을 써 놓고 제사를 지냅니다. 근데 누구한테 애도하는 건지 누구 보라고 그런 분향소를 차린 건지 이해를 못 했어요. 대통령이 보낸 근조 화환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우리 영이 장례식장에 대통령 명의의 근조 화환이 왔는데, ‘윤석열 대통령’ 이라고만 쓰여 있고, 아무런 조의 표시가 없었어요. 우리가 보통 상가집을 가거나 부조를 하면 봉투에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쓰는데 말이죠. ‘아, 이 사람은 정말 상식이 없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정말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고, 하나도 고맙지 않았습니다.
- 정미진 / 고 노류영 씨 어머니

지난 12월 16일 열린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49일 시민추모제에 참석한 유가족의 모습

정작 유가족이 대통령의 애도를 필요로 한 순간에, 윤석열 대통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난 12월 16일,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49재가 열리던 날 유가족들은 이날 만이라도 윤석열 대통령이 진심으로 사과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 같은 시각 윤 대통령은 다른 행사에 참석해 크리스마스트리에 점등 하고, 자신이 살았던 서초구 주민들에게 떡을 돌렸다. 이런 대통령의 모습이 엄마를 더 무너지게 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49재 날, 윤석열 대통령은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식을 하러 가고, 자기 집 이웃에게 떡은 돌리면서도 49재 추모제에는 결국 안 왔잖아요. 그 전날 유가족들이 이날까지는 꼭 사과해 달라고, 마지막이라고 분명히 말했었는데...이제는 우리가 사과하라고, 진상 규명을 하라고 해도 안 할 것 같아요. 유가족 말에는 그냥 귀를 닫고 있는 것 같아서 너무 비참하고 애통해요.
- 정미진 / 고 노류영 씨 어머니

도를 넘는 2차 가해…엄마는 또 통곡했다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엄마에게 최근 여당 소속인 김미나 창원시의원은 다시 한 번 막말로 비수를 꽂았다. 김미나 의원은 ‘나라를 구하다 죽었냐, 자식 팔아서 장사한다는 소리 나온다’ 등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자신의 SNS에 올렸다. 그 글을 본 날 엄마는 밤새 울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리고 이틀 뒤, 유가족 협의회가 김미나 의원을 모욕죄로 고소하며 기자회견을 연 날, 마이크를 잡고 눈물로 김미나 의원의 제명을 호소했다. 

우리는 바라는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식을 팔아서 장사를 하다니요. |
창원 시민 여러분들도 꼭 징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 정미진 씨 기자회견 발언 (2022.12.15)

하지만 김미나 의원의 제명 안건은 지난 18일 창원시의회 본회의에서 부결됐다. 재적 의원 중 3분의 2가 찬성해야 제명안이 통과되는데, 이날 투표 결과는 전체 재적 의원 45명 중 44명이 참석해 찬성 20, 반대 20, 무효 3, 기권 1표로 찬성표가 절반에도 이르지 못했다. 엄마는 다시 한번 절망했다. 

막말을 하는 정치인들은 자기가 막말을 해서 유가족에게 욕을 듣는 것보다, 그로 인해 자신들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렇게 막말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은 그런 정치인들의 말이 사실인 줄 알 거예요. 그런 걸 바로 잡고 싶어서 이렇게 인터뷰도 하는 건데, 바로 잡히지 않고 계속 이태원 참사의 진상 규명의 요구하는 유가족의 목소리가 왜곡되는 현실이 참 속상하네요.
- 정미진 / 고 노류영 씨 어머니

친구 같고 남편 같았던 ‘깔롱쟁이’ 막내딸

1남 1녀 중 막내였던 류영 씨는 다정하고 애교 많은 딸이었다. 대학 입학 후 목포에 살았던 딸은 부산에 있는 엄마에게 수시로 문자를 보내고, 화상 통화를 하며 소소한 일들을 엄마와 공유했다. 예쁜 옷이 있으면 엄마와 이모들 것까지 사서 선물하고, 수시로 엄마가 일하는 미용실에 들러서 쓸고 닦으며 엄마 일을 도왔다. 

영이는 저한테는 정말 특별한 딸이었어요. 옷도 같이 입고, 작은 것 하나까지 다 털어놓는 친한 친구이자 남편 같은 딸이었어요. 완전 깔롱쟁이에다 동네 이모들에게도 살갑게 굴어서 인기가 참 많았어요.
- 정미진 / 고 노류영 씨 어머니

고 노류영 씨와 엄마 정미진 씨

류영 씨는 부산말로 ‘깔롱쟁이(멋쟁이)’에 사교성이 좋아 동네에선 스타로 불렸다고 한다. 류영 씨의 장례식장에는 친구, 후배, 전에 일했던 병원 동료들까지 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녀갔다. 넘치는 조문객들로 두 개의 장례식장 객실도 부족해 추가로 방을 빌릴 정도였다. 류영 씨가 떠난 후 친구들은 엄마에게 류영 씨가 생전에 노래방에서 애국가를 부르던 영상을 보내줬다. 류영 씨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걸 늘 자랑스럽게 생각해 노래방에 가면 늘 애국가부터 불렀다는 것이다. 

영이 친구들은 재밌는 영상이라고 저한테 보내줬는데, 저는 그 영상을 보고 펑펑 울었어요. 그렇게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걸 자랑스러워한 딸이었는데, 결국 국가는 우리 딸을 지켜주지 못 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 정미진 / 고 노류영 씨 어머니

류영 씨가 초등학교 시절 구조해 키우던 고양이 소주와 류영 씨 모습

어려서부터 류영 씨는 동물에게도 마음을 많이 쏟았다. 아픈 동물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 따뜻한 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유기묘를 구조해 ‘소주’라고 이름 짓고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5년을 넘게 키워는데, 류영 씨가 소주보다 먼저 하늘로 갔다. 

유기묘 고양이를 참 좋아했거든요. 초등학교 때 길에서 비 맞아서 다 죽어가는 고양이를 한 마리 데리고 왔는데 내가 싫어하니까 자기 방에 숨겨 놓고 살살 키우고 있더라고요. 그 고양이를 죽기 전까지 끝까지 데리고 있었는데 걔가 이제 지금 십몇 년이 됐죠. 그 고양이가 아직도 살아있어요. 영이가 그 고양이를 너무 좋아했는데... 이제는 친구가 데려갔죠.
- 정미진 / 고 노류영 씨 어머니

커서는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류영 씨가 뒤늦게 간호사가 되기로 마음 먹은 것도 그래서였다. 간호대학에 입학해 오래 품어왔던 간호사라는 꿈에 첫발을 내디녔던 2022년은 류영 씨에게 그 어떤 해보다 특별했다. 늦깎이 신입생이었지만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후배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대학 생활을 만끽했다.

처음 운전면허도 땄다. 지난해 10월 초, 엄마가 사 준 중고차를 타고 신나게 여행 다닐 날만 상상하고 있었다. 이태원에 가기 이틀 전인 10월 27일, 류영 씨는 돌아오는 주말에 엄마가 사준 차를 타고 미용실에 오겠다고 얘기했다. 그러면서 엄마에게 금발 머리를 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래 온나, 해 줄게” 엄마는 흔쾌히 약속했다. 그게 딸과의 마지막 대화가 됐다. 

류영 씨의 아버지가 딸의 사진과 메모를 수집해 만든 앨범들

딸을 보낸 뒤, 엄마와 아빠는 딸의 흔적을 끌어 안고 산다. 아빠는 류영 씨의 사진은 물론 류영 씨가 중학교 시절 작성한 메모 하나까지 모아 앨범을 만들었다. 엄마는 목포에 있는 딸의 자취방에서 1톤 트럭 한대에 달하는 짐을 모두 실어왔다.

류영 씨가 쓰던 침대와 류영 씨가 키우던 강아지. 엄마는 딸이 떠난 후 자신이 쓰던 침대를 버리고, 딸이 쓰던 침대를 사용하고 있다.

딸이 쓰던 침대와 화장대, 심지어 숟가락 하나까지 버리지 않고 부산 집으로 챙겨왔다. 그리고 원래 집에 있던 엄마 물건은 버리고, 그 자리를 딸의 물건으로 채웠다. 그리고 엄마는 매일 딸이 자던 침대에서 잠을 자고, 딸이 쓰던 화장대에서 화장을 한다. 그렇게라도 엄마는 딸의 체취를 느끼고 싶었다.

“희생자 추모 공간이 하루 빨리 만들어졌으면…”

여러 번 신뢰를 저버린 정부에 이제는 사과조차 기대하지 않는다는 엄마 정미진 씨는, 그럼에도 딱 하나 바라는 게 있다고 했다.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공간을 하루 빨리 만드는 것이다. 

인터넷 뉴스로 참사 당일 사진을 봤는데 기절초풍했어요. 순천향대 병원 바닥에 애들 시신 돌돌 말아 가지고 그냥 줄 세워 놨더라고요. 그 아이들 얼마나 추웠을까요. 엄마들이 그거 다 봤잖아요. 전부 다 통곡을 했을 겁니다. 너무 힘들어 가지고... 그 어디 한 군데 내 새끼가 있다고 생각을 하면 가슴이 터지죠. 지금 어쨌든 빨리 (진상 규명이) 잘 되어서 애들 좋은 곳에 보내주고, 추모 공간이라도 있어서 애들 외롭지 않게 다 같이 간 애들 한 군데 모여서 편안해졌으면 좋겠어요.
- 정미진 / 고 노류영 씨 어머니

딸에게 쓴 편지를 읽고 있는 어머니 정미진 씨. 

끝으로 정미진 씨는 딸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있다면서 미리 써 온 편지 한 장을 읽었다. 사람들 앞에선 절대 울지 않는다던 엄마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다 결국 울고 말았다. 이번 편지는 ‘보고 싶은 영아’로 시작한다. 어머니의 그리움이 딸 류영 씨에게 닿길 바라며 편지 내용을 공유한다.

보고 싶은 영아, 사랑하는 영아.
아직도 엄마 귀에는 ‘엄마, 딸내미 안 보고 싶나?’
'사랑하냐'고 몇 번을 묻고 또 묻고 하던 그런 내 새끼 목소리가
아직도 엄마 귀에는 생생하단다. 언제 다시 내 새끼 볼 수 있을까.
이제는 보내줘야 한다는데 밤이 되면 더 생각이 나서 어찌할까. 
이모들 삼촌들 모두 모두 엄마 걱정에 찾아오지만 
네가 없는 지금은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질 않는구나.
류영아, 사랑하는 내 새끼야. 너는 천사 같은 천사, 선녀였다.
그곳에서는 아프지도 말고, 여기서보다 더 예쁘게 행복하게 살아 줄래?
엄마 소원이란다. 마지막 엄마 소원을 꼭 들어주라.
엄마 딸로 와 줘서 너무 행복했다.
고마웠다. 너무 너무 사랑한다. 

-엄마가-
- 고 노류영 씨 어머니 정미진 씨가 쓴 편지

뉴스타파 홍여진 sarang@newstapa.org

Copyright © 뉴스타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타임톡beta

해당 기사의 타임톡 서비스는
언론사 정책에 따라 제공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