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시절 한국영화에 여신이 있었네 … 그녀가 떠났다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3. 1. 20.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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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트로이카' 윤정희 파리서 별세 … 향년 79세

'미자로 태어나 정희로 살다가 다시 미자가 되어 떠났다.' 한국영화 스타 배우 윤정희(본명 손미자·사진)가 10년 넘는 투병 끝에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향년 79세.

20일(현지시간) 영화계에 따르면 알츠하이머병을 앓던 고인은 20일 새벽(현지시간 19일 오후) 프랑스 파리에서 별세했다. 공식 집계 가능한 출연작만 280편인 한국 영화계의 대배우, 문희·남정임과 함께 '19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연 만인의 연인, '건반 위의 구도자' 백건우의 영원한 뮤즈였던 고인은 우리에게 다가온 지 56년 만에 '별'이 되어 우리 곁을 떠났다.

1944년 부산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성장한 고인은 전남여고와 조선대를 졸업했다. '배우 윤정희'의 삶은 그의 나이 스물 셋이던 1967년 '청춘극장' 주연으로 발탁되며 시작된다.

백영민(상대역 신성일)의 연인 오유경 역을 맡은 고인은 개봉 즉시 은막의 스타로 떠올랐다. '청춘극장'은 영민이 종군 간호사가 된 운옥(고은아)과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유경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유경을 택하는 스토리다. 영화사는 1966년 6월 오유경 배역 오디션을 공개 진행했는데 당시 '1200대1'에 달하는 경쟁률을 기록했다.

영화관 시설도 마땅치 않던 시절에 영화 한 편으로 관객 20만명을 모아 '티켓 파워'를 보여준 고인은 그해 대종상 신인상과 청룡영화상 인기여우상을 거머쥐며 스타덤에 오른다. 이후 고인은 해마다 30편 넘는 다작을 남길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다. 당대 최고의 남자 배우로 신성일이 있었다면 그에 비견할 여자 배우가 윤정희였다.

당시 고인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1967년부터 1973년까지 청룡영화상 인기여우상은 7년간 전부 '배우 윤정희'로 기록돼 있다. 고인을 아꼈던 신상옥 감독은 "파격적 캐릭터의 여주인공은 윤정희가 아니면 안 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 시절 고인의 대표작으로는 '안개' '독 짓는 늙은이' '석화촌' 등이 꼽힌다.

윤정희의 운명 같은 전환점은 1972년께 찾아왔다. 신상옥 감독과 독일 뮌헨에서 윤이상의 오페라 '심청' 공연에 참석했다가 평생의 반려자가 된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를 처음 본 것.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좌석을 찾지 못하는 고인을 백씨가 도왔고, 그날 저녁 회식 자리에서 다른 유학생과 달리 수줍어하며 꽃 한 송이를 건넨 백씨에게 고인이 반하면서 인연이 시작됐다고 한다. 두 사람은 1972년 처음 만난 후 반세기 가까이 '잉꼬부부'로 살았다. 1976년 결혼 후 파리에 신혼집을 마련한 부부는 이듬해 당시 공산권이었던 유고슬라비아의 자그레브(현재 크로아티아의 수도)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가 납북(拉北) 위기를 겪기도 했다.

결혼 후 영화보다는 남편의 비서 역할에 더 무게를 둔 고인은 거의 모든 연주회에 동행했다. 소박한 옷차림으로 객석 맨 뒷자리에 앉아 무대 위 남편의 연주를 초조하게 지켜보곤 했다.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고인이 배우로서 맞이한 또 한 번의 전성기였다. 윤정희가 연기한 역할은 본명과 같은 '미자'로, 이 역할에는 그의 일부 이상이 투영돼 있다. 문화원에서 우연히 시(詩) 강좌를 수강하면서 난생처음 시를 쓰게 된 미자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고인은 '시'의 미자 역으로 LA비평가협회상, 시네마닐라국제영화제, 아시아태평양스크린어워즈 등 국내외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당시 칸 국제영화제에 참석했던 고인은 "미자는 꽃 한 송이를 봐도 탄성을 지르고 바람 소리를 들어도 들뜨는 감성이 풍부한 여자"라고 말했다. 다시 한번 영화를 찍을 힘은 고인에게 주어지지 못했다.공교롭게도 고인은 '시'에서 알츠하이머를 앓는 연기를 했는데 고인이 실은 10여 년 전부터 알츠하이머로 인해 투병을 해왔다는 사실이 2019년 보도되며 수많은 안타까움을 샀다.

백씨는 언론에 보낸 메일을 통해 "제 아내이자 오랜 세월 대중들의 사랑을 받아온 배우 윤정희가 딸 진희의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꿈꾸듯 편안한 얼굴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이어 "생전 진희 엄마의 뜻에 따라 장례는 파리에서 가족과 조용하게 치를 예정"이라며 "영화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며 살아온 배우 윤정희를 오래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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