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구룡마을에 큰불 …"다 타버렸는데, 설은 어찌 쇠나"
주민 500명 신속한 대피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어
화재로 불이 확산되던 20일 오전 9시 30분,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4지구에 거주하는 1급 중증 장애인 신 모씨(72)가 슬리퍼를 신은 채 마을회관으로 황급히 들어왔다. 화재로 집이 전소됐다는 신씨는 휘청거리며 모포를 두르고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는 "집이 다 타버려서 어찌할지 모르겠다"며 "내일부터 설 연휴인데 어떻게 보내야 할지 걱정"이라고 토로한 뒤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씨는 대피소로 빨리 이동하라는 이웃의 손에 이끌려 영하의 기온에 슬리퍼를 신고 다시 마을회관을 나섰다.
설 연휴를 하루 앞둔 구룡마을에 지난해에 이어 또다시 화마가 덮쳤다. 강남구의 '판자촌'으로 불리는 구룡마을은 비닐, 합판 등으로 지은 낡은 집들이 밀집해 수해, 화재 등 각종 재난의 손쉬운 먹잇감이다. 지난해 3월에도 불이 나 주택 11채가 탔고, 지난 추석에도 구룡마을 주민들은 명절을 쇠기는커녕 여름의 집중호우 피해를 복구하느라 정든 집을 떠난 채 지내야 했다.
이번 화재는 이날 오전 6시 27분에 구룡마을 4지구에서 발생해 번지기 시작했다. 오전 7시께에는 인근 마을인 5지구 입구까지 불이 옮겨붙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500명 안팎의 구룡마을 주민들은 부랴부랴 집을 두고 대피해야 했다.
메케한 불 냄새로 뒤덮인 마을에선 명절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망연자실한 주민들만 솟아오르는 연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화재로 주택 60가구가 소실되면서 이재민 62명이 발생했다.
이날 집을 잃은 김 모씨(55)는 "10여 년을 살았던 집이 오늘 사라졌다"며 "얼마가 들더라도 내 터전에서 살아가고 싶은데 앞으로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호소했다. 불이 난 4지구에 거주하는 안 모씨(52)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결에 뛰쳐나왔다"며 "대피 방송도 못 하는 마을이라 주민들은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다"고 말했다. 이어 안씨는 "어차피 철거할 집이라고 생각하는지 소방도 집보다 산으로의 확산 방지를 우선시하는 것 같았다"며 "산으로 번지면 안 되는 게 사실이니 이런 위협 속에서 살지 않도록 도와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소방은 화재 발생 5분 뒤에 바로 현장에 도착했고, 오전 11시 46분에 완전 진압을 선언했다. 이날 재난 대응을 위해 소방 197명, 구청 300명, 경찰 320명 등 총 900여 명의 인원이 동원됐다. 장비는 소방 59대 등 총 68대가, 헬기는 서울소방 1대, 산림청 6대 등 총 10대가 투입됐다.
소방의 신속한 대처와 주민들의 대피 덕에 인명 피해는 없었다. 이재민 62명은 강남구 내 호텔 4곳에서 임시로 머물 예정이다. 신용호 서울 강남소방서 행정과장은 "경찰과 소방이 정밀하게 합동조사를 시행해 화재 원인을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구룡마을 주민들은 "이제는 안전한 곳에 살고 싶다"며 구룡마을 재개발 사업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강일 구룡마을 주민 협의회장은 "세월이 흐르며 주민들의 연세가 지긋한 상황"이라면서 "하루라도 어르신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냐"고 주장했다.
[김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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