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열린 칠판 지대

2023. 1. 20.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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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녹색의 농구코트를
일주일에 서너번 지나칠 때
열린 칠판을 떠올린다
손발이 작은 아이들이 그리는
공의 궤적을 따라가며
'고올-인'을 외치곤 한다

일주일이면 서너 번 나는 칠판 위를 지난다. 벽에 걸린 진짜 칠판은 아니고, 칠판처럼 짙은 녹색으로 칠해진 야외 농구코트다. 가운데 하프코트 선과 자유투 라인은 비바람에 지워져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우레탄 바닥도 군데군데 벗겨져 있다. 그래도 높이가 다른 농구대 세 개와 해가 지면 환한 빛둘레를 만드는 조명탑까지 갖춘 어엿한 도심의 놀이 장소다.

모양과 색이 칠판을 닮은 그곳에는 칠판과 어울릴 법한 학생들이 많이 찾아온다. 늦은 오후엔 교복을 입은 남학생들이 칠판 옆 벤치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가방을 내려놓은 여학생들이 농구공을 가운데 두고 손바닥 뒤집기로 편을 나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무리가 그 위에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기도 한다.

농구코트지만 꼭 농구만 하라는 법은 없어서, 누군가는 테니스공으로 캐치볼을 하고, 누군가는 축구를 하듯 농구공을 발로 차며 친구와 패스를 주고받는다. 그러니까 이 칠판은 교실 앞에 버티고 서서 특정인만 허락하는 한정된 권력의 자리가 아니라 누구나 먼저 온 사람이면 일정 시간 동안 자기의 방식대로 즐길 수 있는 열린 놀이판이다. 복장 규정도 없어서 신발은 슬리퍼부터 굽 낮은 구두까지 다양하고, 등번호가 적힌 유니폼을 입은 사람과 치맛자락을 휘날리는 사람이 각자 양쪽의 농구대에서 공평하게 자기 시간을 누린다. 개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도 있고, 벤치에 앉아 햇빛과 바람을 맞는 노인도 있다. 그럴 때면 칠판의 초록빛 지대도 마치 엽록소처럼 나무들의 이파리를 따라 고요히 광합성을 하는 듯하다.

늦여름에 처음 이곳을 지나가기 시작했으니 지금까지 나는 가을과 겨울, 세 계절 동안 칠판을 지켜본 셈이다. 이곳의 가장 어여쁜 점은 나무들이 만드는 지붕과 울타리인데, 여름이면 나란히 선 느티나무들의 가지가 그늘을 만들고, 관객석처럼 뒤편에 선 회양목들은 참새 떼가 몸을 숨기는 안식처이자 삼엄하지 않은 울타리가 되어준다. 가을엔 칠판 위로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다. 공을 든 사람이 발로 쓱쓱 낙엽을 헤치며 농구대 주변만 간신히 쓸어내지만, 바람이 불면 마른 잎들이 작은 소용돌이를 그리며 다시 내려앉는다. 안온한 보살핌 따윈 없는 야생의 환경인지라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날이 추우면 거울처럼 투명한 빙판이 언다. 그런 날엔 새들이 칠판으로 나선다. 흰 눈밭에 찍힌 새 발자국은 어찌나 자유로운지, 반원을 그리며 앞으로 이어지다가 또 다른 발자국과 겹치고,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뚝 끊긴다. 힘차게 날아오른 것이다. 칠판 모퉁이에 서서 나뭇가지를 가만히 올려다보면 흰 뺨의 동박새가 보이고, 운이 좋은 날엔 꼬리 깃털이 긴 오목눈이도 만날 수 있다. 그러다 개근상장을 받을 법한 사람이 찾아와 주머니에서 손을 빼기도 힘든 날씨에 얼음 위에서 공을 튀긴다. 도끼처럼 공을 바닥에 내리꽂으며 얼음을 깬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칠판 사용자는 손과 발이 작은 어린이들이다. 그들은 진지하게 게임의 규칙을 지키기도 하지만, 공의 지름보다 가슴둘레가 작은 아이는 높이 튀어 오르는 공에 순간순간 놀란 얼굴을 하기 바쁘다. 어린이 둘이 한 팀이 되어 성인 한 사람과 대결을 펼치기도 하는데, 가장 작은 아이가 공을 잡으면 반대편 선수도 그 아이의 드리블을 도와준다. 눈치 없이 튀어 오르는 공의 정수리를 대신 눌러주고, 슉슉 팔을 휘저으며 수비하는 시늉도 한다. 그러다 아이가 공을 잡고 골대로 뛰어가면 어른이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골을 넣게 해준다. 어른이, 아이의 키가 되어준다. 나는 농구대 뒤를 지나며 아이의 득점 순간에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지른다. 고올-인-!

칠판 앞에서 나는 즐거움을 나눠 갖는 방법을 배운다. 사철 푸르게 가슴을 열어젖힌 그곳에서 흩어지고 고이는 숨소리들을 듣는다.

[김멜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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