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이면] 고모의 추억

2023. 1. 20.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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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명절이 다가오니 백석의 시 '여우난곬족'이 떠오른다. 평안북도 정주 사람인 그의 일가친척들이 명절에 그득하게 모인 모습을 담은 시다.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 고모" 하면서 쉼표도 없이 써나가는 내용이다. 얼굴에 별 자국이 솜솜 난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신리 고모,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던 말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모, 배나무 접을 잘하고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삼촌 등등.

스무 살에 이 시를 읽을 때 우리 집의 명절은 이미 이런 풍경과 거리가 멀었다. 내가 중2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할머니는 자식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 고향으로 내려가 인연이 끊어졌다. 장남인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 때는 고모 다섯과 삼촌이 모두 내려와 명절이면 북적북적하고 온 집 안에 음식 냄새가 진동하고, 밤새도록 사람 목소리가 끊어지질 않았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점차 고모와 삼촌들의 발길이 뜸해지더니 이제는 우리 직계만 모인다.

아이들에게는 정말 명절처럼 좋은 게 없다. 연날리기며 술래잡기며 찬물에 멱 감기며 모험이란 모험은 다 하고 다니고, 밤이면 한 이불을 덮고 누워 귀신 이야기에 짜릿하다가 혼곤하게 잠에 빠져들어 백석 시에 묘사된 것처럼 아침에는 문틈으로 들큼한 무이징게국 내음이 올라오도록 퍼지게 잤다.

지금 돌이켜보면 꿈같은 나날이었지만 울고불고하는 사연도 많았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큰고모부는 큰고모에게 손찌검을 심하게 해서 형제들이 명절에 모여 분통을 터뜨리며 어떻게 손봐줄 것이냐로 토론을 하기도 하고, 화투판을 벌였다가 새벽녘에 목소리가 높아지고 돈을 딴 셋째 고모가 통박을 주는 오빠에게 울면서 오빠 때문에 우리 딸들은 공부도 못했다고 신세 한탄으로 넘어가는 장면, 잔정도 많고 속정도 많고 다정도 많던 넷째 고모가 혼인 날짜를 받아놓고 고운 목소리로 부르던 유행가 '얼굴'의 가사와 선율과 표정은 사진처럼 찍혀 머리에서 지워지지가 않는다.

늘 다리가 아파 고생하던 둘째 고모는 나이 쉰이 넘어서 애 둘이 딸린 남자와 혼인을 했는데 나이가 우리 엄마와 같아 장남 집으로 시집와서 평생 제사와 명절 음식을 해야 했던 처지를 많이 공감해주던 분이었다. 늘 어린 내게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 올려 눈꺼풀을 뒤집는 묘기를 보여줘 한때 호랑이 고모라고 불렀다.

명절 때 오랜만에 보는 어른들에게 쭈뼛쭈뼛 인사를 하면 늘 달려와 내 양 볼을 신나게 손으로 감싸쥐고는 한참을 웃고 간질이고 놀아주던 막내 고모는 사실 불교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비밀결사처럼 혼자 교회를 다니던 중이었다. 지금은 목사가 되어 해외에서 선교활동에 열심인데 나와는 심리적으로 가장 가까웠다가 가장 멀어진 고모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막내 고모 부부가 큰오빠 부부에게 인사차 들러 하룻밤을 자고 갔는데 내가 고모와 고모부 사이에 끼어서 자겠다고 고집을 부려 어른들이 난감해했던 기억도 있다.

고모부가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사업을 하다 말아먹어 젊어서부터 식당이며 보험이며 험한 일만 악착같이 하며 자식 셋을 키운 셋째 고모는 얼마 전 교통사고로 크게 다치셨다. 하도 보험을 들라고 해서 연락을 끊은 지가 몇 년이라 안부를 여쭙지도 못한다. 이번 명절에는 고모들 생각이 부쩍 나서 백석의 시에 가탁하여 혹은 빙의하여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은 채로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그들을 생각해본다. 고모들을 본 지가 꽤 오래되었다. 이제 자식들 시집 장가를 다 보내고 집안 대소사가 없어 만날 일이 없었다. 명절이 되면 한 번씩 안부인사라도 드리고 싶지만 내 성격상 생색내듯이 살갑게 굴며 전화 한 통으로 도리를 한다는 식의 처신은 어려운지라 그런 핑계로 통화한 지도 어언 십수 년이다.

하지만 늘 그리워는 한다. 올해도 그렇게 나 혼자 그리워하면서 명절을 보내련다. 조기를 구우면서는 짭조름한 굴비를 좋아하던 삼촌 생각 한 자락, 탕국을 먹으면서는 연둣빛 한복에 하얀 앞치마를 질끈 동여맨 고모들의 그 바쁜 북적임들을 생각하면서.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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