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남는 쌀 정부 매입 의무화하면 쌀값 떨어진다?
국책연구기관은 "의무매입 땐 정책개입 없을 때보다 쌀값 13.8% 상승" 예측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쌀값 안정을 위해 과잉생산된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매입(시장격리)하게 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정부 여당의 반대에도 개정안을 국회 본회에서 처리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가운데,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단순히 남는 쌀을 사주는 정책은 농민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작년 12월 말 농식품부 브리핑에선 "(법 개정이) 쌀 공급 과잉과 불필요한 재정 부담을 심화시키고 쌀값을 오히려 하락시켜 농업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기도 했다.
이는 지난해 전례 없는 쌀값 폭락을 경험한 농민 단체들이 쌀값 안정 대책으로 요구하고 있는 양곡법 개정(쌀 시장격리 의무화)이, 재정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기대와 달리 쌀값 하락을 가져와 벼 농가에 득이 될 게 없다는 말로 들린다.
정부 정책 당국자의 이런 판단은 타당한 것일까?
쌀이 주식인 우리나라에선 안정적인 쌀 공급과 가격 안정이 국가 식량정책은 물론 경제 정책의 근간이 돼 왔다. 이를 위해 1948년 정부 수립 때부터 도입한 '추곡수매제'는 수확기에 매입한 쌀을 춘궁기에 방출함으로써 쌀 가격을 안정시키고 농가 소득을 보장하는 역할을 했다.
쌀 수급의 역사를 보면 한동안 쌀 부족으로 생산성 향상에 주력했으나 1970년대 후반 통일벼 품종 보급으로 쌀 자급에 성공했으며, 1980년대 후반부터는 식생활 서구화에 따른 쌀 소비 감소로 남아도는 쌀을 걱정하게 됐다.
그러다 세계무역기구(WTO) 농업 협상 때문에 추곡수매제를 더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정부는 2005년 식량안보 차원에서 쌀을 시가로 매입·방출하는 '공공비축제'와 쌀값이 목표가에 미치지 못할 경우 손실을 직접 보전해주는 '쌀 소득보전 직불제'로 전환하는 양정(糧政) 개혁을 단행했다. 이로써 정부의 직접적인 쌀 수급조절 기능은 약화되고 시장 기능이 활성화됐으나, 쌀 가격의 변동성 확대로 농가 손실 보전에 소요되는 정부 재정 부담이 커지고 쌀 과잉생산을 조장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국회예산정책처의 '쌀소득보전직불제 성과의 실증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이 제도 도입 후 쌀 가격은 4∼5년 주기로 큰 기복을 보여왔고, 쌀 수급 조절을 위한 정책 비용은 제도 도입 직전인 2004년 1조5천500억원에서 2019년 2.1배인 3조1천억원까지 늘어났다. 쌀 생산 확대가 정점에 달했던 1988년 쌀 재배 면적이 126만㏊까지 늘었다가 2019년 73만㏊로 42% 줄고, 같은 기간 연간 쌀 생산량은 605만t에서 374만t으로 38% 감소했음에도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같은 기간 122㎏에서 59㎏으로 52% 급감하면서 수급 불균형이 굳어진 결과다.
그러자 정부는 2020년 쌀 소득보전 직불제를 폐지하는 대신 작물 종류와 관계없이 경작 면적에 따라 직불금을 지급하는 '공익직불제'를 도입했다. 이와 함께 양곡법을 개정해 정부가 적기(수확기 초반)에 초과생산 물량을 매입하도록 시장격리 제도를 확대 시행했다. 이를테면 쌀 재배 농가의 소득안정 장치를 없애는 대신 보다 적극적인 수급 관리로 쌀값을 안정시켜 농민 손실을 막겠다는 취지였다.
제도 개선 첫해인 2020년은 초과생산 물량이 없어 시장격리 조치 없이 넘어갔다. 그러나 2021년 이례적인 재배면적 확대로 쌀 생산이 크게 늘면서 하반기 쌀값이 급락 조짐을 보였으나 정부 당국의 대응이 늦어지면서 쌀값 폭락 사태가 빚어졌다. 농식품부가 뒤늦게 초과생산량 이상(3차례 걸쳐 총 37만t)으로 시장격리에 나섰으나 쌀값은 역대 최대인 25%의 하락률을 기록했다. 쌀값 폭락세는 지난해 9월 정부의 추가 시장격리(45만t) 조치 발표가 있고 나서야 진정됐다.
이 사태 후 야당은 쌀값 폭락의 원인을 정부 정책의 실패로 보고 재발 방지 대책으로 쌀 매입 여부를 당국이 임의로 결정할 수 있게 한 현행 양곡법 조항(16조 4항)을 개정해 초과생산량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매입하게 하는 방안을 내놨다. 농민단체들도 양곡법 개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반면 정부 여당은 쌀 수급에 대한 정부의 정책적 재량을 축소하고 초과생산된 쌀을 무조건 매입하는 것은 수급 불균형을 심화시킬 수 있다며 반대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9월 국무총리실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한국농촌경제연구원(농경연)이 '쌀 시장격리 의무화의 영향 분석' 보고서를 내놓으면서 논란이 확대됐다. 자체 예측모형(KASMO 모형)으로 분석한 결과 양곡법 개정으로 시장 격리가 의무화될 경우 벼 재배면적 감소폭 둔화 등으로 쌀 과잉공급량이 정부 개입이 없을 때(베이스라인)와 견줘 2배 수준으로 증가해 시장 격리에 드는 재정 소요액이 2030년까지 1조4천659억원(9년간 연평균 9천666억원)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는 게 보고서(12월 업데이트 내용 포함)의 골자다.
보고서는 시장 격리 의무화에 따른 재정 부담 확대를 강조했다. 반면 야당과 농민단체는 식량안보 차원에서 보호해야 할 쌀 산업에 대한 철학의 부재를 드러낸 데다, 쌀값 하락 시 정부 개입의 명확한 신호를 주는 것이 지난해와 같은 폭락 사태를 막아 재정 부담을 줄일 것이라며 맞섰다.
농경연 보고서가 처음 공개됐을 때만 해도 핵심 주장인 초과공급량 증가와 재정 부담 확대에 공방의 초점이 맞춰졌고, 쌀 가격 문제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해 12월 국회 요구로 타(他)작물 전환 정책 효과 분석까지 반영한 농경연 보고서('양곡관리법 개정안 효과 분석')가 재차 공개된 뒤 시장격리 의무화가 도리어 쌀값을 떨어뜨려 쌀값 안정 대책으로서 실효성이 의문시된다는 주장이 확산됐다.
농식품부는 지난해 12월 14일 보도자료를 통해 농경연 보고서를 인용해 시장격리 의무화 시 쌀값(80㎏ 기준)이 2030년 17만3천원에서 정체될 것으로 추정하면서 이를 지난해 수확기 쌀 가격(18만7천원)이나 과거 5개년(2017∼2021년) 평균 가격(19만3천원)과 비교하면 각각 5.4%와 8.3% 낮은 수준이라고 밝혔다.
격리를 의무화했을 때의 가격이 과거 가격 수준에도 못 미친다는 것이다.
이런 농식품부의 입장은 시장격리 의무화가 쌀 농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정 장관의 언급을 뒷받침하는 근거의 하나로 보인다.
하지만 정작 농경연의 해당 보고서를 보면 시장격리 의무화가 쌀 가격을 하락시킬 것이란 언급은 없고, 오히려 쌀 가격이 상승할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언급돼 있다. 예컨대 지난해 9월 초판 보고서에는 시장격리 의무화 시 쌀 초과생산량이 증가할 것이라며 '정부 매입으로 쌀 가격이 안정됨에 따라 벼 재배면적 감소폭이 줄어든 반면 쌀 가격 상승에 따라 1인당 소비량 감소폭은 확대되면서 쌀 수급불균형이 악화되기 때문'이라는 내용이 있다.
또 12월 업데이트된 보고서에선 시장격리 의무화 시 '쌀 가격은 연평균 기준 13.8% 상승하는 반면, 가격 상승에 따른 벼 재배면적 감소폭 둔화 등으로 과잉공급량은 베이스라인 대비 약 2배 수준으로 증가할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농경연은 쌀값이 폭락했던 작년 9월의 쌀 시세를 토대로 정부가 쌀 수매에 나서지 않을 경우 수확기 쌀 가격을 15만5천원으로 예측했다. 그런 뒤 이를 기준 가격으로 삼아 미래 쌀값을 산출했다.
양곡법 개정안대로 매년 초과공급량만큼 의무 매수할 경우 쌀 가격이 2022년 수확기에 17만6천원, 2023년 18만원으로 올랐다가 2030년에는 17만3천원(9년간 연평균 17만6천원)에서 안정될 것이란 시나리오다. 이에 따라 농경연은 시장격리 의무화 뒤 9년 연평균 가격(17만6천원)이 기준 가격(15만5천원) 대비 13.8% 오를 것이란 전망을 도출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 쌀값은 정부가 초과공급량보다 더 많은 물량을 매수하면서 이런 예측과 달리 움직였다. 정부가 지난해 9월 초과공급량(15만5천t)의 3배 가까운 45만t(2021년산 구곡 8만t 포함) 매수 계획을 밝히면서 실제론 수확기 가격이 18만7만원까지 올라간 것이다.
하지만 보고서가 전제로 삼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물량을 정부가 수매하며 높게 형성된 현실 가격(18만7천원)을 미리 정한 조건대로 산정한 이론적인 가격(2030년 17만3천원)과 직접 비교해 가격 등락을 단정하는 건 타당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농경연은 또 보고서에서 시장격리가 의무화되면 재정 지출이 증가하는 부작용이 있을 것으로 우려하면서도 "쌀 가격 상승 등으로 쌀 농가의 소득 안정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했다. 이는 시장격리 의무화가 "쌀값을 오히려 하락시켜 농업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정 장관의 말과 배치되는 것으로 보인다.
농경연 보고서의 저자인 김종인 연구위원은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절대적인 쌀 가격을 추정하기 위한 보고서가 아니기 때문에 실제 현실 가격과 비교하는 건 적절치 않지만 전체 가격 흐름이 유사할 것으로 예상할 순 있다"며 "시장격리 의무화는 쌀 소비를 유지시키는 것 다음으로 강력한 가격 안정 대책이기 때문에 시행하면 쌀 가격이 오르겠지만 지속 가능한 환경 속에서의 가격 상승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정부는 매년 쌀값 안정에 힘을 쏟지만 지난해 폭락 사태처럼 실패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만큼 쌀 가격은 예측이 어렵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당해 수급 상황을 좌우하는 최대 변수인 기후 변동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쌀 시장격리 의무화를 둘러싼 공방과 논의를 종합해 보면 의무화 조치를 담은 양곡법 개정이 쌀값 안정을 위한 최선의 대책이 될 것으로 단정하긴 어렵다.
그렇다고 시장격리 의무화가 반드시 벼 재배면적 감소를 둔화시켜 수급 불균형과 재정 부담을 심화시킬 것이란 예측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과거 사례를 보면 정부의 쌀 수급 관리와 손실 보상 정책 속에서도 소비 감소와 맞물린 벼 재배면적 감소 추세는 지속돼 왔고 초과생산량은 일정 수준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추곡수매제 대신 도입된 쌀 소득보전 직불제가 시행된 2005∼2019년 15년 동안에도 정부는 쌀값 안정을 위해 '공공비축'과 '시장격리'를 통해 초과생산분을 대부분 매수하는 수급관리 정책을 펼쳐왔다. 이 기간 쌀값 하락에 대응한 시장격리 조치는 모두 8차례 이뤄졌다. 과거에도 농민들이 쌀농사를 유지하게 만드는 강력한 정책적 유인이 있었던 셈이다.
<표> 연도별 쌀 수급 동향
[자료=한국농촌경제연구원]
그럼에도 통계청과 농경연 데이터를 분석해보면 이 15년 동안 1인당 연간 쌀소비량이 매년 연평균(CAGR) 2.1%씩 줄면서 벼 재배면적도 연평균 2.1%씩 감소한 것으로 파악됐다. 같은 기간 연간 쌀생산량은 연평균 1.9%씩 감소해 소비량 감소에는 못 미쳤으나 초과생산량은 연평균 17만t 수준에서 증감을 거듭했다.
또 쌀 식량자급률은 생산량 감소로 2005년 102%에서 2021년 84.6%로 떨어진 상태다. 이런 가운데 쌀 가격은 4∼5년 주기로 연평균 13만∼21만6천원 사이에서 등락을 반복했다.
농식품부는 의무 매입 조치보다는 쌀 농가가 다른 작물 재배로 전환하도록 해 적정량이 생산되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정주 농식품부 대변인은 "시장격리 의무화가 쌀값 하락을 유발할 것이란 전망에는 농경연 보고서 외에 과거 수급정책 경험도 반영됐다. 과거에도 초과생산 물량을 거의 전량 매입했지만 쌀값 하락세는 계속됐고 남는 물량보다 훨씬 많이 매수해야만 가격을 올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남는 물량을 사주는 건 일시적인 조치여서 항구적으론 적정 생산으로 가야 하는데, 벼에서 다른 품목으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가야지 정부가 남는 물량을 의무적으로 계속 사주게 된다면 쌀 생산이 계속돼 가격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표> 연간 쌀 생산량·소비량 및 벼 재배면적 추이
[※자료=통계청]
abullapi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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