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3년 만에 보러가요”···거리 두기 없는 설 명절 귀성길
“9시40분 익산으로 가는 열차를 타실 분들은 타는 곳 7번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설 연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20일 오전 9시25분 서울 용산역 대기실. 열차 탑승을 안내하는 소리에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전광판을 확인했다. 제각기 무릎이나 허벅지 높이까지 오는 여행가방을 곁에 두고 있었다. 여행가방 손잡이에는 노란 보자기에 싼 명절 선물 세트를 하나둘 걸려 있었다.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가 전면 해제되고 처음 맞는 설 연휴를 하루 앞둔 이날 서울역과 용산역은 아침부터 북적이기 시작했다. 기차를 타고 귀성길에 오르는 시민들은 오랜만에 가족들이 다 같이 모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듯했다. 한 손에는 어린 자녀의 손을 잡고 다른 손에는 바리바리 싼 짐을 들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할머니가 ‘이제 못 알아볼 것 같지 않냐’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서울 서대문구에서 자영업을 하는 이대원씨(35)는 3년 만에 충남 할머니 댁을 방문해 연휴가 끝날 때까지 닷새를 함께 보낼 예정이다. 거리 두기 기간에는 코로나19 감염이 걱정돼 할머니, 할아버지를 뵙지 못했다는 이씨는 “동네에 어릴 때 자주 갔던 갈대밭이 있는데 할머니와 함께 갈 것”이라고 했다.
각종 모임에 인원 수 제한이 사라진 만큼 그동안 못 했던 것들을 이번 명절에 하겠다는 시민도 많았다. 2년 만에 시댁에 간다는 김수경씨(42)는 “가족들끼리 고기도 구워 먹으려고 펜션을 잡았다. 신랑 누나랑 형까지 다 같이 모이는 건 정말 오랜만”이라고 했다. 김씨의 딸 이윤서양(9)도 “사촌 언니, 오빠 만나 같이 놀고 싶다”며 들뜬 모습이었다.
아들과 함께 고향인 경남 창원에 간다는 이상근씨(58)는 “거리 두기 때는 6남매가 각자 시간 되는 사람끼리 4인 이하로 나눠서 부모님 산소를 갔었다”며 “이번 설에는 다 같이 모일 것”이라고 했다. 이씨는 한 손에 가족과 나눠 먹을 육포 선물세트를 들고 있었다.
대표적인 ‘3밀(밀집·밀접·밀폐)’ 공간인 기차 객차에 자녀를 태우기 찜찜해 하던 가족들도 올 설 연휴에는 한시름 놓고 기차를 이용하는 모습이었다. 코로나19 발생 이후 지난해까지 명절에 전남 순천 시댁에 승용차로만 다녀왔다는 황수연씨(37)는 이번에는 세 아이와 KTX를 이용하기로 했다. “(코로나19에) 한번씩 다 걸려서 괜찮을 것도 같고, 시댁 어른들이 안 걸렸을 땐 옮길까 봐 걱정이 됐는데 이제 위험이 크지 않은 것 같아서 안심된다”고 했다.
양손 가득 선물을 준비한 역귀성객도 눈에 띄었다. 이날 아침 울산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한 최천식씨(63)는 한 손에는 금색 보자기에 싼 배 한 상자를, 다른 손에는 선물 포장된 석화김구이를 들고 있었다. 가족·친지들에게 나눠줄 벽걸이 신년 달력도 준비했다는 최씨는 “경기 안산에 있는 누이를 보러 간다. 친척들 보게 돼 기분이 좋다”고 했다.
환한 표정의 귀성객들이 많았지만 명절 스트레스를 숨기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딸과 함께 강원도 모처의 시댁에 간다는 김모씨(55)는 “명절에는 단 한 번도 쉬어본 적이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송이 기자 songy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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