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희 곁을 평생 지켜온 `건반 위의 구도자` 백건우

윤정희, 생전 남편에 대해 "순수하고 착한 사람…내가 생각하던 남자 찾아"
'은막의 스타'와 전도유망 피아니스트 결혼은 '당대 최고의 로맨스'
결혼 직후 납북될 뻔도…50년 가까이 함께하며 문화계 대표 '잉꼬부부'로

2011년 4월 6일 윤정희가 파리에서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를 받은 뒤 남편 백건우와 함께 한 모습. [연합뉴스]

2010년 11월 26일 윤정희가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함께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리는 '제31회 청룡영화상' 시상식 레드카펫을 밟는 모습. [연합뉴스 ]

"제가 생각했던 남자를 찾은 것 같아요. 예술을 하는 순수하고 착한 사람. 제가 럭키한(행복한) 것 같아요."

19일(현지시간)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난 배우 윤정희는 생전에 남편 백건우(77)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서 주연을 한 것을 계기로 당시 인기 예능프로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윤정희는 "그런 사람을 만나 행복하다"고 고백했다.

'건반 위의 구도자'라 불리는 백건우는 윤정희에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기 이전에 착하고 다정한 남편이고 또 친구였다.

"제 남편이 너무 말이 없었어요. 다른 유학생들은 맥주 마시고 그러는데, 꽃 파는 남자에게 꽃을 딱 사 가지고, 그 말 한마디도 없던 사람이 나를 주는 거예요. 평생 그렇게 꽃은 처음 받아봤어요."

윤정희는 독일 뮌헨에서 1972년 백건우를 처음 만났을 당시 자신에게 말없이 꽃 한 송이를 건네던 모습을 이렇게 회고했다.

말 수 없고 수줍음 많던 청년은 후에 평생의 동반자가 되어 묵묵히 그 옆을 지켜왔다. 윤정희는 이미 알츠하이머가 어느 정도 진행됐을 무렵이었는데, 백건우의 연주회 때면 늘 객석의 구석 한편에서 남편의 음악에 말없이 빠져들곤 했다.

1972년 독일 뮌헨 올림픽 문화행사에서 처음 만났던 두 사람은 2년 뒤 프랑스 파리의 한 한국음식점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운명 같은 사랑을 시작하고 2년 뒤 결혼에 골인한다. 결혼식은 두 사람에게 부모처럼 가까웠던 재불화가 이응로(1904~1989) 화백의 파링 20구 자택에서 한복을 입고서 소수의 지인만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열렸다. 이후 둘은 50년 가까이 함께하며 문화계의 대표적인 '잉꼬부부'로 부러움을 샀다.

결혼 바로 이듬해 딸 진희씨가 태어난 다섯 달 뒤에는 이들은 납북(拉北) 미수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 스위스의 한 부호의 연주회 초청을 받고 유고로 들어갔다가 납치 일보 직전에 극적으로 빠져나왔다.

2010년 5월 윤정희가 주연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 개봉을 앞두고 백건우는 마침 도이치그라모폰에서 브람스 신보를 발매한 참이었다. 신보 발매를 알리는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시'에 대해 "영화에 윤정희의 성격이 많이 투영됐다. 이 감독이 너무나 정확히 인간 윤정희를 꿰뚫어 본 것 같아 놀랐다"고 했다.

당시 16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윤정희는 영화 '시'에서 홀로 손자를 키우며 늦깎이로 시를 배우는 '미자' 역할을 맡아 열연했다. '미자'는 윤정희의 본명(손미자)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극 중 '미자'는 실제의 '손미자'처럼 알츠하이머병을 앓으며 서서히 언어와 기억을 잃어간다.

파리의 교민 사회에서 윤정희가 알츠하이머로 투병한다는 소문은 2019년 언론에 공개되기 전부터 이미 조금씩 퍼지고 있었다. 교민들이 모인 자리에서 윤정희가 지인의 이름을 자꾸 잊어버리고 되풀이해 묻는다는 등의 말이 흘러나왔다. 아내의 투병 소식을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던 백건우는 2019년 국내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윤정희가 10년 전부터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고 털어놨다.

음악가 백건우는 아내의 병세가 심각해지고 송사에 휘말리면서도 음악의 끈을 놓지 않았다. 2020년 슈만 신보 발매와 함께 리사이틀 투어를 했고, 작년 9월에도 스페인 작곡가 그라나도스의 '고예스카스' 앨범을 들고 돌아와 전국을 돌며 관객을 만났다.

백건우는 지난 2021년 9월 기자간담회에서 "이때까지 음악인으로서 살아남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며 "이제는 음악을 하면서 나도 좀 즐기고 싶다. 어느 정도 마음의 자유를 찾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신희기자 ksh6142@d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