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이어령도 피할 수 없었던 내집마련 분투기
성북동 단칸방 등 여러곳 전전
가족과 볼품없는 방에 살면서
모두에게 인정받는 대작 발표
공간이 사람을 만들진 못해도
집을 보면 됨됨이 알 수 있어
대가의 공간을 상상하면 집필 욕망을 되찾게 해주는 영혼의 방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방금 천상에서 들려준 영감을 둔중한 탁자 위 원고지에 받아 적는 모습, 황금색 펜을 들어 내면의 색을 눈앞에 전시하려는 다급한 마음 같은 것.
하지만 이러한 낭만적 상상은 대개 허구다. 대가의 공간을 들여다보면 그의 공간은 볼품없는 장소인 경우가 많으며, 생활과 분리되지 않던 공간에서 대작이 탄생하는 일도 많다.
이어령 선생의 동갑내기 아내이자 문학평론가인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의 신작 산문집 '글로 지은 집'은 이러한 진실을 또 한 번 증명한다. 신혼 단칸방에서 지금의 '평창동 499-3' 영인문학관에 이르기까지 작은 집필 공간에서 위대한 문장을 탐색했던 부부의 노고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책은 우리네 옛 삶의 풍경을 하나씩 전시하면서 '한 인간에게 필요한 공간이란 과연 어떤 의미인지'를 사유케 한다.
부부의 첫 신혼집은 성북동 단칸방이었다. 조지훈 시인의 얌전한 한국식 대문이 보이는 집이었다. 장판은 몰라도 도배는 하고 들어가야지 하는 생각에, 신혼부부는 도배지 한 장을 맞잡고 천장에 붙인 뒤 살림을 꾸렸다. 지갑 사정에 비해 호화스러운 '자장면 파티' 외상값 기록이 아직도 가계부 공책에 남아 있다.
삼선교 전차 정류장 근처 셋방은 다음 집이었다. 저자는 그 시절 남편이 사온 붕어 어항을 기억한다. 다음날 아침 붕어 다섯 마리가 전부 어항 속에 얼어붙어 있었다. 구들에 불길이 미치지 않아 방이 냉골이었던 탓이다. 그래도 결과는 해피엔딩. 물을 데워 살살 뿌리니 붕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김남조 선생을 모시고 왔던 청파동1가, 해도 들지 않고 현관이 길에 면해 있던 한강로2가, 박경리 선생의 정릉집을 자주 찾았던 성북동1가 시절 등을 거치면서 부부는 쓰고 또 썼다. 사글세 단칸방에서 한 사람이 연재할 글을 밤새워 쓰면, 배우자와 아이는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으니 집필 공간만이 간절했다. 부부는 마지막으로 '평창동 499-3'에 자리를 잡는다.
첫 사글세 이후 16년 만의 일이었다. 평창동에 자리를 잡은 건 오직 저렴한 땅값 때문이었다. 지금 평창동이야 기세등등하지만 당시엔 성북동 땅값의 4분의 1일 정도였다. 외등이 하나도 없던 빈 산 중턱에 부부는 평생의 터를 잡았다. 돈이 부족해 외벽을 하얀색 페인트를 뿌려 칠한 까닭에 그야말로 '언덕 위의 하얀 집'이었다.
이후 세 자녀가 출가하고 둘이 살기엔 넓어진 집을 부부는 문학관으로 개축한다. 부부 이름 한 글자씩을 따 이름도 영인문학관으로 지었다. 이어령 선생이 쓴 원고료가 벽돌 한 장, 나무 한 그루에 오롯하다. 저자는 적는다. "이어령 선생 한 사람이 글로 지은 집이다. 그의 문학에 대한 대가가 거기 모두 들어가 있다. 그 건물은 그의 원고지 매수의 가시적인 형상이다"라고.
이 책은 2015년 대장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를 거부하며 죽음을 받아들인 이어령 선생이 '한국인 이야기'를 쓰던 당시, 강인숙 관장이 쓴 '집 이야기'다. 받아들여야 하는 죽음이 찾아오고 이제 저자는 홀로 저 큰 건물을 지킨다. 오랫동안 두 사람 몫이었던 생의 외로움은 어느덧 두 배 이상의 부피로 커져 저자에게 다가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기만의 공간을 얻으려 함께 분투했던 저자는 결국 사람이 만드는 공간이 곧 그 사람을 설명해준다는 자명한 진실을 들려준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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