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이 떠난 지 열 달…“진정한 사과 없이 추모 식수하자고?”
지난해 3월 제주대학교병원에서 13개월 영아 유림이는 기준치의 50배에 달하는 약물을 투여받고 숨졌다. 당시 유림이를 담당했던 간호사 등은 업무상과실치사와 유기치사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유족들은 유림이를 잃은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해를 넘겼는데, 이번엔 신임 병원장 취임에 맞춰 추모 식수를 심겠다는 제안이 왔다.
유족 측은 8개월 넘게 아무런 연락이 없던 병원 측의 행태에 "일말의 진정성도 느껴지지 않는다"며 분노하고 있다.
■ 8개월 지나 한다는 제안이 '추모 식수 심자'
유족 측에 따르면, 제주대학교 병원 간호부장 A 씨는 지난해 12월 2일 오후 4시 23분쯤, 의료사고로 숨진 고(故) 강유림 양 아버지에게 '병원 차원에서 진정한 사과를 드리고 싶다'는 취지의 연락을 해왔다.
며칠 뒤 간호부장 A 씨는 유족의 변호인에게 전화해 '신임 병원장 취임 전이라 위치와 규모 등은 결재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피해자를 추모하기 위한 추모 식수 진행 여부에 대한 의견을 달라'는 취지의 의사를 전해왔다.
이번 연락은 지난해 4월 14일 간호부장 A 씨가 유족에게 연락한 뒤 8개월 만이었다.
이 기간 병원은 의료사고에 대해 제대로 인정하거나 유족에게 진심 어린 사죄와 반성의 뜻을 전달한 적이 없었다고 유족 측은 말한다.
유족 변호인은 "병원이 유족에게 진정 책임을 통감하고, 피해자를 기리는 방안을 제시하고자 했다면 무엇보다 의료사고 책임을 진솔하게 인정하고, 사죄의 뜻을 전달하는 행위가 선행됐어야 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 사건 초기부터 비협조적 태도로 일관
제주대병원은 지난해 4월 유족과의 면담에서 '의문점을 면밀히 조사하고, 진상을 투명하게 밝히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하지만 이후 병원은 유족의 의료기록 제공 요청에 '법무팀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이유 등으로 '제공이 어렵다, 법적 절차를 통해 진행하라'고 안내하는 등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유족 측은 "지난해 10월 간호사들의 구속영장 발부를 통해 의료기록 삭제 등 은폐 정황이 백일하에 드러난 시점에서야 피해자를 위한 추모 식수를 진행하자는 구실로 피고인들과의 화해와 화합의 자리를 마련하는 데 힘쓰는 병원의 태도가 마치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중재인을 표방하는 것 같아 몹시 불쾌하다"고 밝혔다.
■ 병원은 쏙 빠진 의료 사망사고
유족이 더욱 분개하고 있는 건 병원이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는 점이다. 병원 내부에서는 이미 사건 초기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온 바 있다.
제주대병원 소아청소년과 모 교수는 지난해 5월 임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해 이번 의료사고가 ①코로나병동(42병동)의 열악한 현실과 ②간호사들의 업무 과중 ③3월부터 영유아 확진자들이 폭증했음에도 성인 환자 경험이 대부분인 간호사들이 투입된 점 ④피해자가 소아병동이나 소아 중환자실에 입원할 수 없었던 점 등을 근거로 병원 운영의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유족 측이 재판에 넘겨진 피고인들의 뒤에 숨어 병원이 책임을 모면하려 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이유다.
관련 기사: 2022년 5월 4일 [13개월 영아 사망 '구조적 문제' 내부서 첫 문제 제기]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455591
유족 측 변호인은 "보호자들은 다시는 우리나라의 의료기관에서 이 같은 투약 과실이 반복되지 않도록, 잘못을 저지른 의료진이 책임을 은폐하지 못하도록, 이번 사건과 같은 불행한 의료사고의 희생자가 줄어드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 아무런 입장도 밝히지 않는 제주대병원
제주대병원은 지난 4월 의료 사망사고 은폐 행위에 대한 언론 보도가 잇따르자 한 차례 공식 사과했다. 하지만 재발 방지 대책과 진상규명에 대한 언론사의 수차례 질문에도 '수사 중'을 이유로 10개월째 아무런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추모 식수 논란과 관련해 간호부장 A 씨는 진심으로 반성하는 차원에서 연락을 드렸던 것이라고 밝혔다. 부경훈 제주대학교병원 사무국장은 추모 식수 논란에 대해 KBS와의 통화에서 "간호부 차원에서 추모 식수 논의가 있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8개월 동안 유족에게 연락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수사가 진행 중이었고, 어느 정도 사실관계가 밝혀지면 사죄의 말씀을 드리고자 했던 것"이라며 "실질적으로 너무 늦은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민사소송에 대비해 연락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결코 아니다"며 "앞으로 유족에게 직접 재차 사죄의 말씀을 드리려고 한다"고 밝혔다. 또 병원 측이 10개월 동안 언론 취재에 응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언론을 통해 내용이 보도되면 유족에게 정확하게 의사 전달이 안 될 수 있고, 오해의 소지도 발생할 수 있어 응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 [영아 사망사고 은폐 10개월…제주대병원은 여전히 침묵]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6324548
■ 유림이 사건 2차 공판 진행…사망과의 인과관계가 쟁점
유림이에게 기준치의 50배에 이르는 약물을 과다 투여하고, 의료기록을 삭제한 간호사들은 현재 유기치사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어제(19일)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에서 열린 2차 공판에서 간호사들은 1차 공판 때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사실 관계를 인정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유기 행위가 유림이의 사망과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유림이에게 에피네프린이 과다하게 투여된 상태에서 에피네프린의 효과를 직접적으로 상쇄할 약품이 없다는 주장이다. 즉, 의료 사고를 은폐하지 않았어도 유림이의 소생 가능성이 없었다는 뜻이다.
이에 검찰은 피고인들의 은폐 행위로 심장 자체에 활력을 주는 치료 기회가 봉쇄됐고, 과다 투여 사실을 의사에게 보고하지 않아 추가로 에피네프린이 또다시 처방됐다며 사망과의 인과관계가 있다고 강조했다.
재판장인 진재경 부장판사는 이와 관련해 공정한 의학적 견해를 듣기 위해 다른 지역 출신인 전문심리위원을 위촉하기로 했고, 피고인 측은 이날 공판에서 증인신문에 김 모 제주대학교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를 신청했다.
제주대병원 의료 사망사고 은폐 사건의 3차 공판은 3월 16일 오후 4시 30분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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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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