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는 쌀을 어찌할꼬 [김상철의 경제 톺아보기]
농가 소득과 식량안보 문제 근본적으로 고민할 때
(시사저널=김상철 경제 칼럼니스트(전 MBC 논설위원))
쌀값이 많이 떨어졌던 작년 9월 정부는 45만 톤의 쌀을 사들였다. 창고에 쌓아둔 쌀은 3년 이상 지난 뒤 주조용이나 사료용으로 보통 20kg당 8000원, 4000원에 각각 팔린다. 이게 바로 시장격리다. 시장격리 요건에 해당할 때 초과 생산량을 수확기에 의무적으로 매입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지난해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에서 의결됐다. 정부와 여당이 반대했지만, 야당은 상임위에서 단독 처리한 개정안을 본회의로 넘겼다.
현재 '양곡관리법' 제16조는 농식품부 장관이 양곡의 가격 안정을 위해 '필요한 경우에는' 양곡 수급 안정 대책을 수립하고 시행할 수 있게 규정하고 있다. 개정안은 매입을 강제하지 않는 규정을 바꿔 쌀 생산량이 예상 수요량보다 3% 이상 많거나 쌀값이 평년 대비 5% 이상 하락할 경우, 초과 생산량 전부를 정부가 무조건 사주도록 하자는 것이다. 지금은 정부의 재량 사항이지만 이를 의무화하자는 취지다. 또 현행법이 추수철이 지나고 농민이 제시한 최저 입찰가로 쌀을 구매토록 하는 데 비해, 개정안은 수확기에 시가로 사도록 바꿔놓았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의 본질
양곡관리법 개정은 단기적으로 쌀 가격을 안정시킬 수 있다. 하지만 쌀이 초과 생산되는 구조를 만들고 이를 고착화하는 제도다. 쌀값 하락의 근본 원인인 수급불균형을 오히려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농민들이 쌀 품질 고급화에 애쓰기보다는 생산량이 많은 품종을 찾을 가능성도 크다. 길게 보면 농민에게 좋기만 한 것도 아니다. 쌀 생산이 계속 늘어나 공급과잉이 심해지면 아무리 수요를 초과하는 물량을 정부가 매입해도 결국 가격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산지 쌀값이 2030년에는 80kg에 17만2709원으로 2022년의 18만7000원보다 낮은 수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재정적인 부담 또한 만만치 않다. 보고서는 "쌀 시장격리 의무화와 다른 작물 재배에 대한 지원을 병행할 때 2030년에는 63만 톤의 쌀이 초과 생산돼 시장격리에만 1조3870억원 등 연간 1조4659억원의 예산이 들어갈 것"이라고 지적했다.
쌀 수매 의무화는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으로 쌀의 공급과잉이라는 부작용이 우려된다며 문재인 정부 시절에도 채택하지 않았던 제도다. 집권당이었던 시절에는 하지 않았던 제도를 도입하자는 더불어민주당의 의도는 정치적이다. 정치적 지지 기반을 호남에 두고 있는 야당이 자신의 지지 세력을 의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쌀 공급과잉 구조를 심화시킨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야당은 생산 조정만 잘하면 시장격리는 발동되는 일이 적을 것이라고 일축한다. 다른 작물 재배 지원사업을 통해 쌀 생산량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쌀 시장격리 의무화와 다른 작물 지원사업을 병행한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쌀을 더 재배하도록 유인하는 만큼 쌀 이외 작물 생산을 지원하는 사업의 정책효과는 줄어든다.
재원은 한정돼 있는데 남는 쌀을 사들이는 데 더 많이 쓰면 그만큼 농업 경쟁력 제고를 위한 투자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문제도 있다. 돌이켜 보면 지난해 가을의 쌀값 하락도 2020년 공익직불제 도입 이후 재배 면적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재배 면적이 늘어나면서 생산량도 증가했고 이 때문에 쌀값이 최고가 대비 28% 하락하면서 정부는 가격 하락을 막기 위해 쌀을 더 사들여야 했다.
물론 우리에게 쌀은 시장 원리의 적용을 받아야 하는 또 하나의 단순한 상품인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발굴된 재배 볍씨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인류 최초의 볍씨가 발견된 곳이 한반도다. 1만7000년 전 한반도에 뿌리를 내린 이래 쌀은 우리의 역사였고 종교였다. 비중이 줄기는 했지만, 쌀은 여전히 우리 국민이 먹는 제1의 식량이다. 지금도 전체 농가의 절반 이상인 52%는 벼농사를 짓는다. 연간 생산액도 8조4000억원으로 농축수산물 중 1위다. 농업소득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도 34%에 달한다. 벼농사는 고령화된 농촌의 버팀목이기도 하다. 정치적인 고려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고 기후변화와 생태환경 같은 공익적 가치도 생각해야 한다.
쌀을 비롯한 양곡의 안정적인 생산과 충분한 식량 확보는 정부의 기본적인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쌀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소비하는 곡물 중 80% 이상을 수입해야 한다. 하지만 국내 곡물 수입의 95%를 차지하는 건 밀이나 콩, 옥수수 같은 3대 밭작물이다. 생산을 늘려야 하는 건 쌀이 아니다. 쌀의 과잉생산은 구조적인 문제다. 쌀은 최근 25년간 두 해를 제외하곤 항상 생산량이 수요보다 많았다. 2021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쌀 소비량은 주식용 299만 톤, 가공용 65만 톤으로 364만 톤이었지만, 생산량은 388만 톤 수준이었다. 쌀 생산이 많이 줄기는 했다. 1990년 124만ha였던 쌀 재배 면적은 이제 73만ha로 줄어들었다. 논에는 쌀만 심으라는 규제는 없어진 지 오래고 다른 작물로 바꾸라고 장려금까지 준다. 하지만 소비가 더 많이 줄었다. 국민 1인당 쌀 소비는 1970년 136.5kg에서 2021년 56.9kg으로 감소했다. 과잉생산은 계속되고, 지금 같으면 쌀값 폭락에 따른 시장격리 요구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야당의 단독 처리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다면 정부의 선택지는 '대통령 거부권 행사'밖에 없을 것이다. 법안이 거부권에 막혀도 사실 야당이 잃을 건 별로 없다. 민생과 식량 주권을 챙기려 애썼다는 명분은 야당의 몫이다. 그러나 우리 쌀 산업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고민은 그대로 남는다.
쌀 수매 의무화가 농업 경쟁력 해칠 수도
우리 쌀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에 대한 국가적 고민이 시작된 것은 1986년 9월부터 개시된 UR(우루과이 라운드) 농업협상부터였을 것이다. 그 후 40년 가깝도록 우리는 한정된 농업 재정의 대부분을 써가며 다양한 정책과 제도로 쌀을 지키는 데 노력해 왔다. 하지만 지금도 우리나라는 해마다 40만 톤 정도 수입하는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전량 자급하는 상황에서 쌓이기만 하는 쌀 재고와 떨어지는 쌀값을 걱정해야 한다.
쌀의 시장격리가 농가 소득을 높이고 식량안보를 지키는 최선의 방책은 아니다. 그렇다고 지금의 양곡관리법을 유지하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현재 쌀 수급 안정 대책으로 마련된 전략작물직불제는 충분하지 않다.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하면서 야당의 양곡관리법 개정에 반대만 하는 정부나 여당도 답답한 건 마찬가지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겨우 쌀이 남으면 정부가 사들이면 된다는 게 전부일 수는 없다. 차라리 남는 쌀을 살 돈으로 생산 조정 지원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방안이 낫지 않을까. 소비 촉진을 통한 수요 확대 방안도 필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농민과 농지의 탈농을 막는 게 과연 옳은지부터 고민을 시작해 봐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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