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들이 좀처럼 패배를 인정하지 않은 이유

한겨레 2023. 1. 20.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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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이선경의 나를 찾아가는 주역]

영화 <한산:용의 출현>의 한 장면. 제작사 제공

“조선 사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열렬한 민족정신이다. 조선 사람은 애국심과 자신의 친구, 가족, 왕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종종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맞았으며, 자신이 지키려는 원칙을 위해서라면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끝까지 용감하여 좀처럼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구한말 호수돈여고를 세워 개성 지역의 여성 교육에 공헌했던 엘라수 와그너(Ellasue C. Wagner·1881∼1957)는 그녀의 저서 <코리아: 더 올드 앤 더 뉴>(Korea: The Old and the New)에서 한국인의 특징을 위와 같이 묘사하였다. 열렬한 민족정신, 자신이 지키려는 원칙을 위해서는 위험과 고통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물러서지 않는 용감함, 이것이 당시 한 서양 선교사의 눈에 비친 조선인의 특징이다.

■ 자신이 지키려는 가치를 위해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

와그너가 보았던 열렬한 민족정신과 자신이 지키려는 가치를 위해 용감하게 나아가는 모습의 대표적 사례로 3.1만세운동과 의병의 봉기를 들 수 있겠다. 이와 관련하여 2018년 광복절, 한 매체(<제이티비시> 뉴스룸)의 보도가 인상적이었다. 보도의 요지는 대략 이러하다.

을사늑약 뒤에 정작 당황했던 쪽은 일본인들이었다는 말이 있다. 조선의 임금이 일본에 국권을 넘겨주겠다고 도장을 찍었는데, 왜 백성들이 왕의 말을 따르지 않고 의병까지 일으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일제가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운동이 일어났던 지역을 지도로 만들어둔 <소요일람지도>((騷擾一覽地圖)를 보면, 그것은 어느 일부 지역이 아닌 전국적이고 전민족적인 항거였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우리가 듣기에는 매우 못된 표현이지만 오죽하면 그들이 “조선의 의병은 파리떼와 같아서, 파리가 극성을 부리는 곳에서는 살 수가 없다”고 투덜댔을까.

임금이 도장을 찍었거나 말았거나 전 국민이 일어나 불의한 침탈에 항거하고, 삶의 안락함 대신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위해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기꺼이 감내하는 이런 행동은 누가 명령한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개개인의 주체적 결단과 불굴의 의지로 스스로 결행해 나가는 일이다.

필자는 한국인의 이러한 특징이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라 깊은 역사와 뿌리를 지녔으며, 특히 도덕 형이상학이라 불리는 성리학의 진리관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본다. 오늘날의 한국인은 가까운 과거였던 조선 왕조의 후예이며, 누가 뭐래도 조선을 이끌어간 중심사상은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의 진리관이 수세기에 걸쳐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지탱해 왔다고 한다면,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조선인의 가치관과 행동 양식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성리학은 단지 조선조 지식인들의 고준담론이나 지적 탐구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삶의 태도와 관습으로서 사람들의 일상 전반에 스며든 성리학의 진리관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무엇보다 한국인의 도덕 관념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한 생각을 펼치기 전에 먼저 ‘도덕’이라는 용어에 대해 덧붙일 말이 있다. 흔히 ‘성리학’이라는 말에는 ‘엄숙한 도덕주의’라는 관념이 따라붙곤 한다. 물론 성리학이 일종의 도덕주의를 표방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때의 도덕을 그저 ‘의무적이고 규범적인 규율’로만 여기는 것은 적절치 않다. 성리학의 관점에서 도덕적으로 산다는 건 외적으로 부과된 율법을 엄격하게 지킨다는 뜻이 아니라, 내 마음속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따라 사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때 자연스러운 본성이란 남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측은지심), 불의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분노하는 마음(수오지심), 염치를 알고 사양하는 마음(사양지심),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시비지심)이다. 즉, 인의예지(仁義禮智)가 통합된 진실한 인간성은 누가 억지로 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도덕적 행위란 내 안의 인의예지를 실천함으로써 나답게 살아가는 일, 나아가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것은 외적인 강제가 아닌 내적인 자발성으로부터 비롯된다.

■ 내 안에 사람됨의 표준, 인극(人極)이 있다

위 그림은 퇴계 이황이 갓 등극한 소년 임금 선조에게 바친 책 <성학십도>((聖學十圖)의 10개 그림 중 첫번째인 <태극도>이다. 첫 자리에 놓은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황은 <태극도>가 ‘성학(聖學)’ 즉 이상적 인격을 갖춘 훌륭한 임금(聖君)이 되는 공부를 여는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왜 그랬을까? 단편적으로 말하자면 <태극도>는 나의 현재 모습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와 상관없이 궁극적 진리의 표준이 내 안에 불변하는 본성으로 깃들어 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진심으로 노력한다면 누구라도 예외 없이 자신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여 진정한 자아를 성취해 나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적 제왕으로 일컬어지는 요·순(堯舜)이 평생 애쓴 일도 먼저 나를 잘 닦음으로써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일이었다.(<논어>)

백성이 편안하다는 것은 단지 물질적인 의식주의 풍요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일차적으로 의식주를 갖추고, 그 기반 위에서 궁극적으로는 예의와 염치를 아는 도덕 문화의 기풍을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성 스스로 인의예지의 본성을 닦아나가도록 돕는 교육 및 사회제도를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문화적 기풍이 흐르는 사회가 성리학이 추구하는 이상적 사회의 모습이며, 이 같은 원대한 목표를 향한 첫걸음이 바로 <태극도>에서 제시하는 ‘나 닦음’이라 할 수 있다.

다소 난해한 부분이 있겠지만 위의 <태극도> 그림을 간략히 해석해보자.

<태극도>에서는 먼저 맨 위에 태극을 ㅇ 동그라미 모양으로 그렸는데,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태극 문양과 전혀 다르다. 성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본래 이치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떤 형상으로도 그릴 수가 없다. <태극도>에서 태극을 텅 빈 ㅇ 모양으로 그린 것은 보이지 않는 이치를 설명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태극기의 경우는 자연 변화의 리듬 자체를 강조해 음양의 율동 모양을 태극이라 불렀지만, <태극도>는 그러한 자연 변화의 리듬을 가능하게 하는 이치를 태극이라 부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두 태극의 모양이 지칭하는 바는 다르지만, 후자는 이치(ㅇ)이고 전자는 그 이치가 구체적으로 실현된 모습이니 둘은 별개가 아니다. 성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음양이 물결치는 모양은 태극이라는 이치가 눈에 보이게 발현한 모습이다. 태극 ㅇ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이치라고 해서 이 세상과 동떨어져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늘 세상 속에 함께 있지만, 그것을 원리적으로 구별해 보는 것이다.

두번째의 동그라미의 한가운데 들어있는 작은 동그라미 역시 ‘음양의 변화 가운데 불변하는 태극의 이치’가 들어있음을 뜻한다. 위의 그림에서 검은 띠는 음의 작용을, 흰 띠는 양의 작용을 나타낸다. 그 아래 그림에서의 큰 동그라미 역시 하늘과 땅의 작용에도, 개개 만물에도 태극이 들어있음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와 같이 태극은 우주의 궁극적 표준이자 음양오행의 변화 가운데 내재해 있고, 개체 속에 내재해 있으면서 결코 변치 않는 표준으로 인식된다. 다시 말해 태극은 우주 전체를 총괄하는 이치인 동시에 각각의 사사물물에 내재된 선천적인 본성을 가리키는데, 바로 각자에게 부여된 그 본성이 각각의 존재가 좇아야 할 본모습이자 모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 역시 자신의 내면을 잘 들여다보면 거기서 ‘사람됨의 표준’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사람됨의 표준’을 성리학에서는 ‘인극’(人極)이라 부른다.

이처럼 우주의 보편적 진리가 내 안에도 내재하므로 개개인은 절대적 주체이다. 그런데 태극은 사람뿐 아니라 이 세상의 개개 사물이 모두 지닌 것이기도 하다. 마치 천지인 삼재 사상에서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을 천지 부모의 기운을 나누어 받은 존재자들로 인식하듯, 성리학에서도 이 세상의 모든 개체가 태극을 품고 있다고 본다. 태극은 나와 타자의 공통분모이다. 그러니 개개인은 그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지만, 천지 공동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협동적 주체이기도 하다.

■ 태극을 펴내는 사람의 길, 인의(仁義)

<태극도>의 의미를 해설한 <태극도설>은 결론에서 사람의 길을 제시한다. 그 내용이 <주역>의 다음 구절이다. “하늘의 길은 음과 양으로 세우고, 땅의 길은 부드러움(柔)과 단단함(剛)으로 세우며, 사람의 길은 인과 의로 세운다.” 천·지·인이 각기 상반자의 상호작용으로 그 질서가 운영된다는 말이다. 사람의 길에서 인(仁)은 양(陽)의 작용을 하며, 의(義)는 음(陰)의 작용을 한다. 인(仁)이 생명의 약동과 발산이라면, 의(義)는 그것을 적절하게 제어하고 가다듬어 결실을 맺도록 한다. “의(義)는 ‘알맞게 함’, ‘마땅하게 함(宜)’이라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자연의 길에서는 음과 양이 밀고 당김으로 우주적 생명이 지속되어 간다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은 ‘인’과 ‘의’의 균형과 조화에서 찾을 수 있다.

태극기의 물결치는 태극이 봄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에 따라 생명을 길러내는 삶을 담고 있고, 그 덕(德)을 원·형·이·정이라 한다면, <태극도>의 태극은 인간을 중정인의(中正仁義)를 운영하는 절대적인 도덕 주체로 정립하였다. 태극이 자연에서 발현되면 원·형·이·정이고, 인간에게서 발현되면 인·의·예·지이니, 그 실질은 같다. 그리고 인·의·예·지를 축약해서 말하면 인의(仁義)로 대표된다. <주역>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음과 양의 작용이 갈마드는 것이 자연의 길이며, 그러한 자연의 길을 이어받는 것이 선(善)이다. 우리의 본성에는 그것이 내장되어 있다.”

인간의 본성으로 내장되어 있는 태극의 구체적 내용은 인의(仁義)라는 음양의 작용을 통해 상대적 선악을 넘어서서 보다 큰 차원에서의 선(善)을 실현해 가는 것이다.

봄에는 만물을 살리지만 가을에는 거두고 쳐내어 생명의 균형을 이루듯, 사람의 길은 사랑으로 포용하고 의(義)로써 가지를 쳐내 삶의 균형을 이루어 간다. ‘인’의 생명살림과 ‘의’로써의 절제라는 상반된 가치가 종합되었을 때 태극의 의미는 완성된다.

인과 의의 변주는 다시 말하면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수오지심(羞惡之心)의 협주이다. 측은지심은 ‘남의 고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이며, 수오지심은 ‘옳지 못한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고 분노하는’ 마음이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마땅히 보호되어야 할 생명이 손상당할 때 분노, 항거, 투쟁함으로써 온전한 삶을 회복하기를 목표한다.

지난해 개봉된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왜군 포로 “대체 이 전쟁은 무엇입니까?”
이순신 “의(義)와 불의의 싸움이지.”
왜군 포로 “나라와 나라의 싸움이 아니고요?”
이순신 “그렇다.”

경북 영덕 영해면에서 3.1운동을 재현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단지 내 나라를 침략해 삶의 터전을 짓밟은 적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맞서 싸우는 차원을 넘어 무도하게 침략해 온 불의를 응징함으로써 보편적 대의를 바로 세운다는 뜻이다. 구한말의 의병장 유인석은 을미사변 후 봉기한 무력투쟁의 의미를 “단지 우리 국모가 시해당했다는 복수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저들이 보편적 인륜과 정의(正義)에 어긋난 짓을 자행했기 때문에 그것을 응징하는 것”이라 정의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남녀노소 없이 거국적으로 일어난 3.1만세운동 역시 단지 내 나라를 침략한 적에 대한 적개심의 발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공동체를 수호하려는 의지와 보편적 정의에 반하는 불의에 대한 분노를 함께 담고 있다. 수오지심의 분노는 사사로운 복수심을 넘어선 태극의 마음이다. 이러한 분노는 피폐와 파멸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남을 살리고자 하는 거룩한 분노이다. 불교학자 김성철 교수는 4.19혁명이 당시 <뉴욕 타임스> 등 서구의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고, 1960~70년대 차별철폐, 반전·반핵 운동과 같은 미국 내 학생운동을 불러일으키는 촉매가 되었다는 연구를 발표한 바 있다.

성리학이 바라보는 인간은 ‘각자가 태극을 품은’ 선(善)을 본질로 한 존재이며, 자율적 판단에 따른 인의예지의 실행 주체이다. 스스로 도덕 주체인 개개인은 전체주의에 휩쓸리지 않으며, 동시에 협동적 주체이기에 이기주의에 매몰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진리관은 공교육 기관인 향교, 지방 고등교육의 산실인 서원, 마을의 서당, 자치 규약으로서의 향약 등을 통해 방방곡곡에 뿌리내렸고, 생활 속의 유교로 체현되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갔다.

오늘날 내가 속한 공동체를 위하여 각자가 책임의식 속에 의사를 결정하고, 참여하며, 행동하여 보다 나은 나의 공동체로 성장시켜가는 행동 양식을 민주적 거버넌스(governance)라 한다면, 이러한 민주적 행동 양식을 꽃 피울 수 있는 저력은 이미 전통 속에서 축적되어 온 것이 아닐까?

글 이선경(조선대 초빙객원교수・한국주역학회 차기 회장)

*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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