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없이 고독 끌어안았던… 예술가 18인을 향한 부부의 사랑고백”[M 인터뷰]
버지니아 울프·카프카·나혜석…
18인에 바치는 편지 36통 담아
논의없이 각자 방에서 홀로 써
책 표지도 앞뒤 구분 따로 없어
위대하지만 돈·명성·쾌락 누린
피카소같은 이에겐 편지 안써져
너무 앞서가서 고통받고 핍박…
뒷걸음치지 않은 그들에 경의를
취향도 생각도 열렬히 다른 둘이
쓰면서 마음 포개지고 내면 성장
“어쩌다 보니 부부 시리즈 3부작이 됐어요. ‘어 이렇게 되면 이혼은 좀 어렵겠군’ 하는 생각이 먼저 드는데요?” 함께 쓴 산문집 ‘계속 태어나는 당신에게’(난다)를 출간한 장석주(68)·박연준(43) 시인. 지난 연말 서울 중구 문화일보사에서 만난 두 사람은 이렇게 말하며 크게 웃었다. 2015년 한 달 호주살이를 각자의 기억에서 써내려간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로 결혼소식을 알린 두 사람은, 2017년에도 ‘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보오’를 통해 부부가 읽고 감응한 책들을 독자들과 나눈 바 있다. 세 번째. 이번에는 두 시인이 한 예술가를 향해 편지를 썼다.
18인에게 썼으니 총 36통. 공교롭게도 세 권 모두 한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리즈’라 이름 붙여도 손색없다. 각기 다른 주제로 쓰였으나, 매일 마주하는 부부인 동시에, ‘시’라는 한곳을 바라보는 시인으로서의 두 사람이 오롯이 담겼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온 개별 예술가로서의 부부를 ‘따로 또 같이’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결이 비슷하다.
시작부터 ‘농담’이 세다 싶은데, 부부는 더 나아간다. 일본의 유명한 작가 부부 다나카와 ?타로와 사노 요코를 예로 든다. 각자 여러 번 결혼과 이혼을 반복한 두 사람은 문단을 떠들썩하게 한 연인이었다. 연작 소설도 함께 쓰고, 책도 냈으나 결국 이혼했다. 장 시인은 “독자들을 실망시켜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스쳤다”고 했다. 책마다 깃든 부부의 순전한 마음을 드러낸 것이리라.
에릭 사티, 김소월, 버지니아 울프, 프란츠 카프카, 권진규, 나혜석, 장국영, 다자이 오사무…. 편지를 보낼 18인을 선정하는 일은 빠르고 쉬웠다. 부부가 오랫동안 사랑하고 존경해 온 예술가들이 크게 다르지 않아서다. 인물이 ‘합의’가 되면, 별다른 논의 없이 각자 방에 들어가 홀로 썼다. 그러면 온도가 다른 편지글 두 편이 나왔다.
박 시인은 “서로 어떤 내용을 쓴지 모른 채, 연재하는 잡지에 바로 보냈다”면서 “사고방식과 문장 스타일이 다르다는 게, 이렇게 서로 다른 글을 만들어 내는 게 신기하고 흥미로웠다”고 전했다. 예컨대, 첫 번째 수신인인 피아니스트 에릭 사티에게 박 시인은 자신이 얼마나 그의 선율을 사랑했고, 그것이 얼마나 큰 시적 영감이 되어 주었는지를 주로 고백했다면, 장 시인은 “우리는 고독 속에서 온전한 사람들”이라며 동류의식을 표하고, 고독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 전반을 자연스럽게 편지에 담았다. 그렇게 한 편 한 편의 편지는 두 시인 고유의 자장 안에서, 그 자체로 완성돼 있다. 그러면서도 두 편을 함께 읽으면, 더 풍부하고 온전한 기분이 드는 것.
책의 기획의도와 특성상 부부는 ‘따로’ 글을 써야 했지만, 이들은 각자의 글쓰기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그래도 박 시인은 “다른 부부들에 비하면 붙어 있는 시간이 정말 긴 편이다”고 했다.
둘은 함께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동네 카페에 간다. 단순하고 규칙적이다. 자주 가는 카페가 세 군데 있고, 번갈아 다니며 글을 쓴다. 함께 있지만, 서로 어떤 글을 쓰는지는 잘 모른다고.
잠깐씩 외유를 하고 돌아오는 건 주로 박 시인. 7년째 받고 있는 발레 강습과 친한 문인들과의 술자리가 종종 있어서다. 장 시인이 “공사다망한 건 박 시인 쪽이다. 나는 술과도, 바깥세상과도 멀어진 상태”라고 하자, “지금 자신이 얼마나 고독해졌는지 하소연하는 것이냐”고 박 시인은 응수했다. “박 시인은 발레에 관해 쓰면 좋은 글이 나올 것 같은데. 어때요? 발레엔 어떤 ‘시적 에스프리’ 같은 것들이 있거든….” 동료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다운 남편의 조언이다. 술에서 발레로, 화제 전환도 성공.
“맞다, 얼마 전 영국 로열발레단 전준혁 씨가 제 SNS에 댓글을 달아줬어요!” 발레를 하는 것도, 또 보는 것에도 열정적인 박 시인은 이번 책을 쓰고 난 후에 가장 마음이 아렸던 예술가로 러시아의 발레리노 바츨라프 니진스키를 꼽았다.
20대에 발레의 역사를 새로 썼고, 삶을 사랑했고, 동시에 자신이 예수보다 고통스럽다고 여긴 천재. 10년을 화려하게 날고, 30년을 빛을 잃어간 니진스키에게 박 시인은 “당신은 미친 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감히 상상하지 못하는 ‘미친 열정’을 가졌을 뿐”이라고 다독인다. “어떤 답을 구하는 질문을 할 수도 있지만, 찬찬히 말을 걸다 보니 어느새 주제넘게 위로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의 삶이 아프고, 먹먹했어요. 당신을 본 적은 없지만 느낄 수는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건 전혀 새로운 글쓰기 체험이었고요.”
다 쓰고 보니, 책이 호명한 18인의 예술가들은 모두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이다. 가만히 부르면 조금씩 슬퍼지는 이름들. 엄청난 재능과 남다른 열정이 있었으나, 살아있는 동안 불운과 불행을 떨칠 수 없었고, 불의의 사고로 요절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래서일까. “천국” “좋은 꿈” “쾌청한 날씨” “고요와 평온” 등 두 시인은 늘 다채로운 낱말들로 망자의 안녕을 기원하며 편지를 마무리 짓는다. 장 시인은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왔다’는 에릭 사티의 말을 곱씹었다. “너무 앞서가서 고통받고, 낡은 시대에 핍박받은 이들을 향한 사랑 고백이죠. 그들에게 젖줄을 대고, 오늘도 수많은 예술가가 태어나고 자라니까요.” 박 시인도 덧붙였다. “위대하지만 피카소처럼 생전에 돈과 명성, 지복과 쾌락까지 누린 인물에겐 편지가 써지지 않아서요.”
예술가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숙명과 고독이고, 책은 그것이야말로 창조를 위한 질료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편지 속에서 예술가들의 삶을 좇으며, 예술가로서, 시인으로서 삶을 사는 태도와 시선을 다시 배우고 깨달았다고 했다.
장 시인에 따르면 그것은 뒷걸음치지 않는 것. 예술가는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독과 불행을 오히려 덥석 끌어안는다. 그리고 “그것의 반복이 예술가에겐 직업 같은 경험이 되고 예술의 질료로 작동하게 된다”고 했다.
“천재 예술가들은 사람들이 놓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세상을 좀 더 살만한 곳으로 바꿔주는 DNA를 가진 사람들이죠.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어요.” 그리하여, 비운의 조각가 권진규의 말은 더욱 선명해진다. ‘범인에겐 침을, 바보에겐 존경을, 천재에겐 감사를’이라고 했던 그것. 장 시인의 첫 미술평론 대상이 바로 권진규였다. 이번 책에서 다시 그와 대면한 시인은, 애절한 마음을 담아 그를 기린다.
권진규가 등장하자, 박 시인은 “최근 MZ세대 미술 애호가들이 권진규에게 열광하는 걸 아느냐”면서 “장 시인이 MZ 감성과 통한다는 걸 새롭게 발견했다”며 웃었다. 지난해 권진규 탄생 100주년 회고전에는 BTS RM의 소장품이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실 두 시인이 앞서간 예술가들에게 바치는 말은, 이 책을 쓴 두 시인에게 우리가 하고픈 말과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이들 역시 뒷걸음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창조의 질료를 끌어모아 시라는 예술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지 않나.
그리고 이 매력적인 독서 경험은 앞뒤 구분없는 독특한 책 표지를 볼 때 이미 시작된다. 책의 양 끝, 그러니까 박 시인의 글은 ‘박연준 지음’이 있는 표지에서, 장 시인의 글은 ‘장석주 지음’이 있는 표지에서 출발한다. 여러 번 뒤집고 돌려볼 수밖에 없다. 그러다 한가운데에 도달해, ‘장석주 시인에게’ ‘박연준 시인에게’하고 서로를 향한 두 시인의 다정한 편지를 마주하게 된다.
박 시인은 “각자 다른 방에서 같은 이름을 부르던 시간은 즐거웠고, 취향도 생각도 열렬히 다른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포개졌다”면서 편지를 쓰며 지나온 시간을 애틋하게 회고한다. 장 시인은, 고백하고 빈다. 책을 쓴 후 “우리 내면의 아이는 더 성장하고, 폐소공포증은 나아졌다”고, “세상에 소금과 후추가 필요한 만큼 편지 한 통의 보람과 기쁨은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두 사람이 쓴 편지들이 “야만의 세상에 선한 영향력이라는 작은 파문을 만들기를 바란다”고.
■ 두 시인의 새해 다짐
장석주 시인 “다듬지 못한 몸과 글…‘잃어버린 근육’을 찾아서”
박연준 시인 “모든 걸 새롭게 정비…‘디지털 디톡스’가 1순위”
박연준·장석주 시인은 10년 연애를 하고 지난 2015년 1월 초 혼인신고를 했다. 두 사람을 인터뷰한 건 새해를 사흘 앞둔 지난해 12월 29일. 곧 결혼기념일 아니냐며 소회를 물으니 “혼인신고 날짜도 기억나지 않는다”며 웃었다. 그러다 생각이 났다. 부부가 된 해 처음으로 함께 쓴 산문집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를 내면서, 그 출간일(12월 24일)을 결혼기념일로 하기로 했던 것을. 질문을 바꿨다. 과거 말고 미래로. 책 제목(‘계속 태어나는 당신에게’)처럼, 부부는 어떻게 계속 태어나기로 했느냐고.
“2023년은 ‘잃어버린 근육을 찾아서’가 될 것 같아요.” 새해 다짐을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빗대며, 장 시인이 먼저 입을 뗐다. ‘근육’은 두 가지 의미다. 코로나19로 운동을 못해 사라진 몸의 근육이기도 하고, 그동안 써 두고 다듬지 못한 글이나 시들이기도 하다. 장 시인은 운동량을 늘릴 생각이다. 책도 여러 권 준비 중이다. 가장 먼저 산문집 ‘에밀 시오랑을 읽는 오후’(현암사)의 출간이 예정돼 있다. 그는 “인위적으로 시간을 분절해 삶의 계획을 짜고 기분을 바꿔 전환점으로 삼는 건 ‘인간의 습관’이다”면서 “지금껏 지속해왔고, 또 추구하는 것으로는 일상의 안정, 평화로운 마음, 단순한 방식의 삶과 같은 것들이 있다”고 말했다.
박 시인은 “시간의 분절이 인간의 관점이긴 하지만, 또 그게 없으면 이렇게 다시 다짐할 수가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해가 바뀌면 새로운 기회를 얻은 것처럼 시간이 소중해진다”면서 “정신 좀 차리고 모든 걸 새로 정비하고 싶다”고 했다.
신년 계획 1순위는 ‘디지털 디톡스’. 그동안 SNS 등을 통해 독자들과 꾸준히 소통해 온 박 시인이지만, 가능하면 스마트폰 사용을 줄이려 한다. 2004년 활동을 시작해, 어느덧 등단 20년을 향해간다. 시간을 아껴 본업과 본질에 충실하고 싶은 것. “지난해 소설도 썼고, 산문집도 냈지만…, 저는 시인이잖아요. 무엇보다 시를 더 많이 쓰는 해가 되길 바라요.”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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