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꺾마’는 아름답기만 할까[오늘을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2022년 카타르월드컵에서 한국 선수들이 흔든 태극기에 적혀 있던 문구다. 한 e스포츠 선수의 인터뷰에서 유래한 이 문구에 많은 사람이 희망을 담아 이야기했다. 월드컵 이후 언론은 ‘누칼협의 시대가 가고 중꺾마의 시대가 왔다’며 붕어빵틀로 찍어낸 듯한 기사를 내보냈다. 정지우는 ‘중꺾마’를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라 했고, 심너울은 ‘우리 세대의 정신 속에 강력한 의지와 긍정성 또한 있다고 믿게 되었다’라고 했다.
한 사람의 강인한 의지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지만 이 마음은 미시적으로 볼 때만 아름답다. 중꺾마의 세상을 줌아웃해 전체를 조망해보자. 모두가 서로를 향해 비장한 결기를 다지는 풍경. 모두가 중꺾마를 외치는 세상은 각자의 신을 믿고 싸우는 종교전쟁 같다. 이교도를 무찌르러 나선 십자군 병사의 마음은 죽어도 좋을 만큼 숭고하다. 그러나 상대도 나와 똑같은 마음을 갖고 있다는 걸 아는 순간 그 마음은 숭고함을 잃는다. 중꺾마의 서사가 사실이라면 우리에게 밀려 16강에 탈락한 우루과이와 가나 선수들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 부족했던 걸까? 중꺾마의 세계는 이 질문에 ‘yes’라고 답한다. 우리의 결기가 그들보다 나았기 때문에 승리했다고 말한다. 어디서 많이 듣던 논리 아닌가. 이건 ‘항상 상대보다 더 노오력하라’는 헬조선식 귀결이다. 그들은 마음이 꺾여 패배한 것이 아니라 패하고 나니 ‘마음부터 글러먹은 사람’이 된 것이다. 하지만 중꺾마의 세계는 패배한 사람들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다. 이 찬사는 승자의 전리품이다. 중꺾마의 세상에서 ‘마음’이 인정받는 과정은 헬조선 세계에서 ‘노오력’이 사후 승인받는 과정과 유사하다.
개인에게 비장한 결기가 요구되는 세계는 야생이다. 동시대 사람들이 그런 마음가짐을 선망한다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야생에 가깝다는 뜻이다. 어떤 이들은 중꺾마 현상에서 아름다운 연대의 가능성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중꺾마에 나타난 연대의식은 모두의 공존을 위한 연대라기보다는 죽기 살기로 상대를 꺾고야 말겠다는 전우애에 가깝다. 누구나 낭만을 말할 자유가 있지만, 본인 소망을 말하기 위해 현상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한 마음’이란 자연스럽게 동하는 내면의 폭풍이다. 중꺾마의 서사는 인간의 원초적인 마음마저 치열하게 ‘노오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누칼협’만큼이나 삭막하다. 중꺾마 현상이 내게 준 교훈은 우리 주변을 그렇게 비장하게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려운 시기 스포츠가 주는 감동은 고마운 일이지만 그라운드의 비장미에서 모두가 교훈을 얻을 필요는 없다. ‘꿈은 이루어진다’던 2002년의 슬로건이 그라운드 바깥을 구원해주지 못했던 것처럼 중꺾마의 결기 역시 그라운드에 남겨 두어야 한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비장한 정신무장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비장하게 만드는 것들을 찾아 해소하는 일 아닐까.
정주식 ‘토론의 즐거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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