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은 펼침막과 함께 온다…희망찬 빛 가득하길 기원하며

오윤주 2023. 1. 20.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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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시에 봉화 광산 생존 광부 박정하(63)씨의 손글씨로 제작한 펼침막이 걸렸다. 경북도 제공

명절은 펼침막과 함께 온다. 설 명절을 앞두고 전국 주요 기관·거리 등에 펼침막이 홍수를 이룬다. 내년 총선을 겨냥해 얼굴·이름을 알리려는 정치인, 오는 3월 조합장 선거 후보 등의 펼침막이 거리 곳곳에 나부낀다. 어려운 경제 상황과 환경적 부작용 등을 고려해 펼침막을 자제하는 곳도 늘고 있다.

경북도청이 있는 경북 안동시 곳곳에는 설을 앞두고 ‘희망찬 빛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라는 손글씨체 펼침막이 걸려 있다. 지난해 11월 매몰 221시간 만에 구조된 봉화 광부 박정하(63)씨의 글씨체로 만든 펼침막이다. 손으로 쓴 박씨의 퇴원 기자회견문은 광부들의 노동환경 개선을 주문하는 메시지와 함께 기품 있는 글씨체로 주목받았다. “꿈을 꾸고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새해 복 많이 지으십시오!”라는 펼침막은 칠곡군 할매 글씨체다. 칠곡군은 2020년 칠곡군에서 성인문해교육으로 한글을 배운 이종희(91) 할머니 등의 손글씨로 글씨체를 만들었다. 도 관계자는 19일 “의례적인 귀성 환영 명절 펼침막을 피하고 싶었다. 도민과 귀성객에게 희망과 감동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는 광부 박정하씨와 칠곡 할매 글씨체가 제격이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두 펼침막은 이철우 지사 명의로 경상북도 23개 시·군의 주요 길목 168곳에 걸렸다.

19일 광주광역시 동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인근에 걸린 물절약 촉구 펼침막.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지역 현안과 관련한 호소형 펼침막도 있다. 가뭄에 시달리는 광주·전남 지역에 특히 많다. 광주 충장로·금남로 등엔 ‘광주시민 상수원 동복댐 3월말 고갈 위기, 주민 1인당 20% 물 절약 실천에 동참해주세요’ 등 펼침막이 걸렸다. 한국후계농업경영인회 등 10여개 농민단체는 전남도청 진입로에 ‘농업인 생존권 보장하고 식량주권 지키는 양곡관리법 개정 환영’ 등 펼침막을 걸었다. 부산 연산동 거제시장엔 ‘마, 함 해보입시더’라고 쓴 부산엑스포 유치 펼침막이 걸렸다. 과일상 강아무개(67)씨는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어 새해 인사 펼침막을 붙이지도 않는다”고 전했다.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몸살을 앓는 강원 삼척시는 성묘 직후 차량·의복 소독, 양돈농가 방문 자제 등을 당부하는 펼침막 20개를 시내 곳곳에 설치했다.

충북도청 주변은 사회단체들의 도정 홍보 펼침막이 경쟁적으로 내걸렸다. 일부에선 ‘동원’ 의혹까지 제기한다. 충북어린이집연합회, 충북육아종합지원센터, 바르게살기운동 충북협의회, 민족통일충북도협의회 등은 ‘충북도 사상 최대 정부예산 8조3065억원 확보’ 문구를 담은 펼침막을 경쟁하듯 내걸었다. 김영환 충북지사의 대표 공약인 ‘레이크파크 르네상스’와 역점 사업인 ‘중부내륙특별법’을 홍보하는 펼침막도 곳곳에 나부낀다. 이선영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사무처장은 “아무리 관변 단체라고 하지만 지금껏 행정기관의 실적·정책을 노골적으로 홍보하는 펼침막을 내걸지는 않았는데 충북에선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며 “거의 같은 문구가 다른 이름으로 걸리는 것을 보면 관에서 요구했거나, 관에서 예산을 좀 더 받아보려고 단체가 과잉 충성한다는 의혹이 짙다”고 말했다.

충북도청 앞에 걸린 도정 홍보 펼침막. 오윤주 기자

이날 오후 대전 둔산동 대전시청 네거리 일대에도 국회의원, 시장, 구청장, 시의원 등이 건 설 인사 펼침막이 펄럭였다. 이동호 청주시 상당구청 광고물 담당 주무관은 “지난해 12월 정당 정책·현안에 관한 입장을 광고·홍보하는 것을 통상적 정당 활동으로 보장하는 취지로, 펼침막 게재 등을 제한하지 않기로 ‘옥외광고물법’을 개정하면서 정당 등이 내건 펼침막이 크게 늘었다”며 “명절을 앞두고 관련 민원도 많다”고 말했다.

펼침막 내걸기를 자제하는 곳도 있다. 대구시, 전북 전주시의회와 전남 고흥군의회는 설 명절 펼침막을 걸지 않기로 했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지난 1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자기가 한 것도 아닌데 거짓 공적을 써서 현수막을 내걸거나 의례적인 설날 인사로 전국이 현수막 몸살이다. 설 지나면 이런 거짓, 과시성 현수막은 도시 미관만 해칠 뿐이니 바로 철거하겠다”고 밝혔다. 고흥군의회도 18일 “매년 명절 인사 성격의 홍보성 현수막이 무분별하게 설치돼 미관을 해치고 안전사고 등을 일으킨다”며 명절용 정치 펼침막을 걸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오윤주 기자, 전국종합 st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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