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썸&산] 상처를 받아 삼키는 마법 같은 섬을 주문하셨나요?

신준범 2023. 1. 20.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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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 서도면의 본섬, 나들길 걷기와 대빈창해변 캠핑
대빈창해변 노을을 보지 않고서 주문도 다녀왔다 할 수 없다. 끝없이 펼쳐진 해변과 무인도 몇 개만 떠있는 풍경, 마법 같은 노을은 금방 사라진다.

썰물이 되고 싶었다. 모두가 밀물이 되고자 하는 세상, 슬그머니 그들 사이를 빠져나와 아무도 없는 어딘가로 흘러가고 싶었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출근 차량을 거슬러 강화도로 갔다. 강화읍내로 가는 차들과 작별하고, 석모도로 가는 차들과 헤어지고, 마니산으로 가는 차까지 떠나보내고서야 선수포구에 닿았다.

철부선에서 내려 주문도 살곶이항으로 들어서는 정신과 전문의 나해란씨와 국악인 박자희(왼쪽)씨.

빈 선착장엔 공사 차량 몇 대뿐, 차가운 아침 바람만 부산을 떨고 있었다. 빈 철부선이 어색했다. 덕적도나 굴업도 가는 철부선에 비하면 빈 배나 마찬가지였다. 주문도 여행의 주인공은 비범한 두 여인, 히말라야 트레킹을 두 번 다녀온 정신과전문의 나해란 박사와 국악인 박자희 명창이다.

부드러운 첫 인상이다. 낮은 능선이 구름처럼 굴곡을 그리며 흘러가고 있었다. 마중 나온 이는 없었다. 공사 차량과 트럭 몇 대가 30초도 되지 않아 사라지고, 살곶이(살꾸지)는 여백으로 가득했다.

'곶'은 바다로 튀어나온 돌출된 곳을 뜻한다. '살'은 사이를 뜻하는 삳間이 변한 것으로 강화도 사이의 돌출된 곳임을 감안하면, 예부터 바깥세상과 이 섬을 연결한 통로로 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서도초중고교 부근의 한적한 저수지. 뚝방 너머로 바다가 펼쳐진다.

주문도는 '블랙야크 섬&산 100'에 속하지 않는다. 인증을 위해 찾는 여행객이 없는, 관광명소로는 무명에 가까운 섬인 것. 그래서인지 정적이 짙게 드리워 있어 사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힘이 있었다. 우리의 입도는 밀물에 실려 온 듯 자연스러웠다.

강화 나들길 12코스인 주문도는 섬을 한 바퀴 둘러보는 11km의 걷기길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섬에 스며들었다. 앞장술해변이 말수 적은 시골 여인처럼 다가와 있었다. 동쪽 해변은 앞장술, 서쪽 해변은 뒷장술인데, '장술'은 백사장이 워낙 길어 파도를 막아 주는 언덕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앞장술해변의 드넓은 갯벌을 즐기는 나해란씨와 박자희(오른쪽)씨. 나들길 12코스는 앞장술해변을 따르다 주문도리의 서도중앙교회로 이어진다. 바다 건너 석모도 해명산이 긴 능선을 드러내고 있다.

넓디넓은 갯벌에 아침 햇살이 감겨들고 있었다. 훅 풍겨 오는 평화로운 바다 비린내. 지평선 끝까지 드러나는 압도적인 쓸쓸함에, 여행자의 고독은 감히 견줄 수 없었다. 주문도 여인 앞장술이 문득 술상을 내어와 말 한마디 없이 낮술을 권할 것 같았다. 모래사장이 넓어 파도도 다가오지 못하는 해변을, 오전의 햇살이 끊임없이 쓸어 만지고 있었다.

압도적 광활함으로 여행객을 맞아주는 앞장술해변. '장술'은 모래사장이 너무 넓어 파도를 막아주는 언덕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삼별초 때 봉화 올린 봉구산

마을로 들어서도 한적하긴 마찬가지였다. 1905년에 지었다는 서도중앙교회. 조선시대 전통과 일본 방식이 섞인 건물에서 120여 년 전 혼란스러웠던 시대의 냄새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원형 그대로 보전되어 있다는 게 놀라웠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룻바닥에 방석이 깔린 예배 공간이 있었다. 먼 섬에 뿌리내린 그 옛날 신앙의 깊이가 남아 있었다.

주문도리에서 느리로 이어진 찻길. 나들길 12코스는 찻길과 들길이 섞여 있다.
물고기 비늘처럼 섬세한 물결의 층이 새겨진 뒷장술해변. '장술' 이름에 걸맞게 드넓은 해변이라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 제격이다.

주문도의 유일한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했다. 주인 부부가 정성껏 키운 온실에는 바나나 나무며 열대 지방에서나 자랄 법한 식물이 가득해 작은 정글 같았다. 잔디밭을 뛰노는 고양이 가족의 애교도 새벽부터 집을 나서 달려온 여행자의 빠른 속도를 내려놓기에 나쁘지 않았다.

주인아주머니는 "지금 경운기 타고 갯벌에 나가야 조개를 캘 수 있는데"라며 물때를 일러주었으나, 지금은 커피 향과 배 드러내고 누운 고양이 위에 떨어지는 햇살로 만족스러웠다.

섬치곤 논이 넓었다. 겨울 잠 자는 평범한 휴식기의 논 같은데 다가가면 철새들이 "푸드득"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날아올랐다. 그러고 보니 논 곳곳에 앉아 있는 철새 떼가 보였다. 갈색 깃털이 논바닥과 흡사해 날아오르는 걸 보고서야 구분이 되었다. 능선을 가로지르는 고개를 넘어서자 북쪽 마을 느리였다. 능선을 넘어서며 여행 후반으로 접어드는 느낌이다.

주문도의 명물인 120여년 역사의 서도중앙교회로 이어진 계단길. 시골 섬의 소박함과 한가로움이 곳곳에 깃들어있다.

봉구산은 147m로 낮지만 섬 최고봉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봉화를 올려 소식을 전하던 군사적 요충지로, 서도면의 여러 섬 중 최고봉이다. 고려 삼별초 항쟁 당시 봉화를 올려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섬 이름은 임진왜란 때 임경업 장군이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고자 배를 타고 길을 나섰는데, 폭풍으로 이 섬에 발이 묶여 인조에게 이 사실을 문서로 전했다고 해서 '아뢸 주奏'자를 써서 주문도奏文島로 쓰였다가, 세월이 흘러 지금의 주문도注文島가 됐다는 설이 있다.

느리는 북쪽 끝 선착장이다. 주차장엔 트럭 한 대만 있을 뿐 팔각정과 민박 간판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2년 전 강화까지 30분 만에 닿는 배편이 남쪽 살곶이에 생기면서, 여러 섬을 둘렀다가 마지막에 닿는 1시간 20분 소요의 느리항은 뭔가 느긋해진 듯 고요하다.

대빈창의 대단한 노을

나들길 12코스는 곧장 뒷장술해수욕장으로 가라 권하지만, 대빈창으로 갔다. 섬 내 유일한 캠핑장이 있는 노을 명소를 지나칠 순 없었다. 어느 해변이든 텐트를 치더라도 잔소리 할 성품의 주민들은 아닌 듯했으나, 캠핑장으로 정해진 곳에 텐트 치는 것이 예의일 터. 대빈창은 옛날 중국 사신이나 어부들이 뱃길을 오가며 쉬었다 가는 숙박촌이 있었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나들길은 앞장술과 뒷장술 해안 뚝방을 따라 이어진다. 섬 특유의 바닷바람이 강해 보온 채비를 단단히 하고 나선 박자희씨와 나해란(오른쪽)씨.

찻길을 따라 작은 고개를 넘어, 수확이 끝난 빈 논두렁을 지나자 소나무숲이 나왔다. 정갈한 소나무 숲을 지나자 곧장 모래해변이었다. 해수욕장이란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해변이었다.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 바다에 조명이 켜졌다. 말수 없는 시골 여인이 붉은 얼굴을 하고선 천천히 다가왔다.

썰물의 뒷장술은 갯벌 평원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광활한 여백이 펼쳐진다.
대빈창해변의 감미로운 노을. 캠핑 의자와 테이블을 놓고 주문도 여행의 낭만을 즐긴다.

아름답다고 얘기하면 평범해질 것 같아 노을을 진득하게 음미하기로 했다. 캠핑 테이블과 의자를 바다 앞에 놓고, 자연이 들려주는 드라마를 보았다. 대사가 없어도 지루할 사이 없이 대빈창 노을은 금방 끝을 맺었다.

매점이나 식당 하나 없는 해변의 야영장에 텐트를 쳤다. 모처럼 맛보는 짙은 어둠이었다. 원초적인 밤바다 곁에서 나는 시큼한 냄새가 왠지 푸근했다. 바람은 차가웠으나 날은 뭉툭했고, 파도는 쉼 없으나 거칠지 않았다. 소나무 숲은 거대하지 않지만 푹신했다. 포장해 온 도시락과 과일은 푸짐하지 않지만 부족하지 않았다.

새 소리가 햇살을 불러왔을까 착각이 들만큼 동시에 다가왔다. 신선한 햇살이 텐트를 관통했다. 침낭 밖으로 얼굴을 내밀자 입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파도 소리가 배경 음악처럼 깔렸다. 대빈창의 화장기 없는 아침, 바다는 어제보다 더 평온하고 아늑했다. 관광객 한 명 오지 않는 이 바다 앞에 멍하니 앉아 있으면, 외로움, 상처, 굴욕 같은 그림자들이 저절로 빠져나와 바다로 흘러갈 것 같았다.

텐트를 정리하고 어제의 카페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로 요기를 하자, 여행의 만족도가 차올랐다. 허기는 면해야 몸도 마음도 풍경을 받아들인다.

여정의 마지막 뒷장술해변이다. 이름처럼 뒤에 숨겨둔 갯벌이었다. 갈치 비늘처럼 은빛으로 반짝이는 막막하도록 넓은 해변이 펼쳐져 있었다. 바다를 향해 걷는 두 사람이 햇살 속에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뒷장술의 마술이었다.

​대빈창해변 소나무숲에서의 야영. 캠핑장이 있어 고즈넉이 하룻밤 보낼 수 있다.

주문도 가이드섬 내에는 버스나 택시가 없다. 다만 숙소를 예약했다면 선착장에 태우러 나온다. 강화 나들길 12코스는 살곶이 선착장에서 시작하는 총 11km의 원점회귀 코스이다.

선착장에서 출발해, 앞장술~서도중앙교회~느리항~뒷장술~살곶이를 경유하는 원점회귀 코스다. 3~4시간 정도 걸린다. 길 안내 이정표나 표지기가 충분하지 않으므로, 지도 앱을 사용해 목적지를 찾아가는 것을 병행해야 한다.

하이라이트만 즐긴다면, 뒷장술해변과 대빈창해변만 둘러봐도 충분하다. 두 해변은 주문도에서 서쪽 해안선으로 썰물 때는 걸어서 넘어갈 수 있다. 살곶이선착장에 도착해 곧장 뒷장술을 거쳐 대빈창으로 넘어가서 1박 야영 후, 다음날 섬 내 식당에서 백반을 먹고 나오는 1박2일 코스가 알차다.

대빈창해변 소나무숲에 야영데크가 있으며, 주차장에 텐트를 쳐도 야영의 낭만을 즐길 수 있다. 다만 겨울철 개수대와 화장실은 운영하지 않는다.

교통

강화도 선수선착장에서 주문도 살곶이로 가는 배편이 하루 3회(07:50, 10:30, 15:20) 운항한다. 30~40분 걸린다. 살곶이에서 선수항으로 가는 배편이 하루 3회(08:45, 13:00, 16:15) 운항한다. 편도 요금은 5,750원. 차량은 편도 요금 3만6,000~4만3,000원.

숙식

주문도 플러스 가이드 기사 참조

월간산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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