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설경구 "색다른 항일영화 '유령', 女액션 매력적이죠"
[스포츠한국 조은애 기자] 배우 설경구(55)가 아니었다면 이정도의 존재감을 가진 캐릭터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의심과 야심 사이, 미묘한 이중성을 가진 무라야마 쥰지는 영화 '유령'(감독 이해영)의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주도하는 주인공이다. 설경구가 완벽한 열연으로 쥰지의 입체성을 선명하게 띄워 올리며 또 한번 관객들의 호평을 모으고 있다.
18일 개봉한 '유령'은 1933년 경성, 조선총독부에 항일조직이 심어놓은 스파이 '유령'으로 의심받으며 외딴 호텔에 갇힌 용의자들이 의심을 뚫고 탈출하기 위해 벌이는 사투와 진짜 '유령'의 멈출 수 없는 작전을 그린 작품이다. 마이지아의 소설 '풍성'을 원작으로, 2018년 '독전'으로 감각적인 연출력을 인정받은 이해영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제가 일제강점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한 번도 안 해봤어요. 그래서 호기심이 있었고 감독님을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니 그 시대를 다룬 많은 작품들이 있었지만 좀 다른 결로, 장르적으로 접근하고 싶다고 해서 관심이 생겼어요. 항일영화 중에서도 조금은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했죠."
설경구가 연기한 무라야마 쥰지는 조선말과 사정에 능통해 성공 가도를 달리는 엘리트 군인이었지만 좌천돼 총독부 통신과 감독관으로 파견된 인물이다. 유령을 찾으려는 덫에 걸린 후, 자신 또한 용의자임에도 군인 시절 경쟁자였던 카이토(박해수)보다 먼저 유령을 찾아 경무국으로 복귀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
"쥰지는 군인 명문가 7대손이면서 어머니의 혈통이 계속 부딪히는 인물이에요. 출신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한편 콤플렉스 덩어리이기도 해요. 쥰지의 출세욕은 야망에서 오는 게 아니고 '조선'이라는 태생의 비밀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본인도 절반은 조선의 피가 흐르니까 그걸 지우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우잖아요. 그런 면에선 연민이 있었어요. 아마 쥰지가 내린 모든 선택의 감정이 한 가지는 아닐 거예요. 치욕도 있고 어머니에 대한 애정도 있을 것이고요."
'유령'엔 끝없이 서로를 의심하고 또 연대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쥰지 외에도 박차경(이하늬), 유리코(박소담), 카이토, 천계장(서현우) 등이 각자의 신념과 개성으로 부딪히며 완벽한 앙상블을 만들어낸다. 그 중에서도 쥰지는 의심받는 용의자와 유령을 잡아 복귀하려는 야심이 섞인 이중적인 면모로 궁금증과 긴장감을 유발하며 관객을 교란시킨다.
"많은 캐릭터들이 나오지만 쥰지는 약간 혼선을 주는 역할이에요. 대놓고 유령처럼 드러나보이면 재미가 없으니까 계속 알 듯 모를 듯한 눈빛, 정확하지 않은 표정에 집중하면서 연기했어요. 배우로서 기능적으로 접근해야 했다고 봐야죠. 근데 쥰지의 마음을 어떤 단어로 설명하긴 어려운 것 같아요. 복합적인 감정을 가진 인물이라고 표현하는 게 최선이었어요. 사실 저도 아직 쥰지의 속을 잘 모르겠어요."
이해영 감독 특유의 감각이 녹아든 영상미는 '유령'을 보는 또 다른 재미다. 선명하면서도 강렬한 색감부터 시대 배경을 고스란히 담은 소품, 벼랑 끝 위압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서양식 호텔 등이 다채로운 시각적 쾌감을 전한다. 쥰지는 도마뱀 같은 그린 컬러, 미끈거리는 가죽 코트, 카키색 군복 등 과감한 색을 활용한 의상으로 복잡한 속내를 표현했다.
"쥰지의 의상이 참 부담스러웠어요. 제가 그런 초록색 코트를 언제 입어보겠어요.(웃음) 멋이 중요한 캐릭터였어요. 쥰지가 진한 자주색 베스트를 안에 입는데 입다보니까 책에서만 보던 그 시대 흑백사진에 과감하게 색을 입힌 느낌이 들더라고요. 한 컷마다 구석구석 닦아낸 느낌이랄까요. 독특한 색감이 감독님의 장점인 것 같아요. 모든 장면에 감독님의 애정이 느껴져서 더 특별했던 작품이에요."
영상미 외에도 '유령'은 호쾌한 장르의 변주로 재미를 안기는 영화다. 촘촘한 심리 첩보극으로 시작해 액션 장르로 마무리짓는 역동미가 있다. 잡으려는 사람, 잡혀서는 안 되는 사람 등 캐릭터들 모두 각자의 의지에 따라 격돌하는데, 설경구는 이하늬와 처절한 육탄전을 벌이며 분위기를 압도했다. 성별의 차이를 뛰어넘는 두 사람의 리얼한 액션은 뜻밖의 쾌감을 안긴다.
"'유령'은 여성 캐릭터들이 전사로 나오는 게 매력적인 영화에요. 이하늬 씨랑 액션 촬영을 할 땐 저도 조금은 선입견이 있어서 혹시 다치거나 사고가 날까봐 조심스러웠는데 하루 찍어보니까 조심하지 않아도 되겠던데요.(웃음) 하늬 씨가 정말 강했고 잘 받아줬어요. 솔직히 아무리 제가 선배여도 상대 배우가 짜증내거나 한숨 쉬면 신경 쓰여서 자신 있게 할 수가 없는데 하늬 씨는 액션도 밝게 찍더라고요. 덕분에 정말 즐겁게 촬영했어요. 무엇보다 이런 여성 액션이 되게 반갑잖아요. 그 시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꺼내서 주 테마로 가져간다는 것 자체가 진짜 매력적이죠. 여배우들이 총을 막 난사하는데 엄청 통쾌하더라고요. 거칠면서도 낭만적이었고요. 저는 이솜, 이주영 씨의 연기가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유령'이 이하늬가 열고 박소담이 닫은 영화라고들 하시는데 저는 이솜이 열고 이주영이 닫았다고 생각해요. 영화가 끝나도 두 배우들이 계속 생각나더라고요. 요즘 너무 브로맨스만 많잖아요. 더 강렬한 여성 액션 영화들이 많이 나와야 된다고 봐요."
지난해 '킹메이커',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야차' 등 영화계와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플랫폼을 넘나들며 활약한 설경구는 올해도 다작 행보를 이어간다. 변성현 감독, 전도연과 호흡을 맞춘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부터 '더 디너'(가제), '더 문'(가제), '소년들' 등의 공개를 앞뒀다. 꾸준히 많은 작품으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는 그는 "연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다"며 솔직한 속내를 전했다.
"예전엔 매너리즘 같은 게 있었어요. 연기를 그냥 하고 있더라고요. 그저 촬영 끝나면 다음 작품 하고. 근데 어느 순간 '나 추락하겠다, 근데 아직 젊은데 어쩌지?' 싶더라고요. 그러던 중에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으로 살짝 구제받으면서 연기가 소중하게 느껴졌어요. 현장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됐고요. 언젠가 '자산어보' 찍을 때였는데 이정은 씨랑 촬영 전에 분주한 분위기 속에서 잠깐 바다를 보면서 앉아있는 순간이 너무 평화롭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와, 지금 되게 행복하지 않냐?' 물었던 기억이 나요. 현장에서 숨 쉴 수 있다는 것, 그게 너무나 감사하고 또 새로운 연기에 도전하게 만들어요."
스포츠한국 조은애 기자 eun@sportshank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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