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김장하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아라”
화제의 다큐 ‘어른 김장하’
최근 한 지역방송 프로그램이 화제를 일으켰다. <엠비시(MBC) 경남>이 지난해 마지막 날과 새해 첫날 2부작으로 방영한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다. 방영 직후 유튜브에 공개한 이 프로그램은 잔잔하지만 넓게 퍼지는 물결처럼 누리꾼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뜨거운 호응과 함께 재방송 요구까지 늘면서 문화방송은 오는 23일과 24일 설 연휴에 전국 방송을 하기로 결정했다.
“아픈 사람한테서 번 돈, 함부로 쓸 수 없었다”
경남 진주에서 반세기 넘게 ‘남성당한약방’을 운영해온 김장하(79) 선생이 대중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은 아니다. 39살이던 1983년 진주에 세운 명신고등학교를 1991년 국가에 헌납했을 때, 당시 가치로 100억원이 넘는 자산의 기부를 다룬 미담 기사가 많이 나왔다. 하지만 세간의 관심은 금방 꺼졌다. 그의 기부가 거기서 끝났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인터뷰는 모두 다 거절해왔기 때문이다.
1991년 당시 인터뷰를 추진하다가 포기했던 <경남도민일보>의 김주완 기자는 32년 기자 생활을 은퇴하면서 자신처럼 은퇴를 앞둔 선생을 찾아간다. 2022년 5월 말 60년간 운영해온 한약방의 문을 닫으면서, 30년 전 자신이 세운 남성문화재단도 마지막으로 경상국립대에 기증한 선생의 삶의 궤적을 김 기자는 따라간다.
“채우고 비우기 위해서 돈을 버는 사람.” 주변 사람들은 선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처음 한약방을 연 그의 옆집에 살았던 이웃은 “이 동네 사람들 다 ‘김 약국’ 없으면 못 살았지. 돈 없을 때마다 금고처럼 갖다 썼으니까”라고 기억한다. 선생이 준 장학금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문형배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2019년 열린 선생의 깜짝 생일잔치에서 “(받았던 돈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아라”고 했던 선생을 회고하다 끝내 목이 메었다.
선생은 “한약방에서 머슴살이하다가” 18살에 국가에서 시행한 한약사 자격시험에 합격해 이듬해인 1963년 경남 사천에 처음 한약방을 열었다. 다른 약국보다 싸면서도 좋은 약재를 써 효험이 좋았던 남성당한약방 약은 전국에 소문이 나 첫차가 다닐 때부터 앞에 긴 줄이 섰다. 선생은 많을 때는 직원 스무명과 매일 새벽까지 약을 지어 큰돈을 벌었다.
<어른 김장하>에는 수많은 이들이 등장해 선생에 대한 고마움을 표한다. 이는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려는 연출 의도가 아니라 사실 궁여지책이었다. 선생이 끝까지 자신을 설명하는 인터뷰를 거절했던 탓이다. 대신 김 기자는 자주 찾아가 선생이 좋아하는 야구 이야기도 하고 옛날에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도 한다. 선생은 즐겁게 추억을 더듬다가도 얼마나 많은 이들을 도와줬는지, 얼마나 많은 돈을 기부했는지 등의 질문에는 입을 다문다.
“살면서 그런 지지를 받아본 적이 없어요”
선생의 손길로 숨통이 트인 사람들의 증언은 2시간 분량에 다 담지 못할 정도다. 선생의 도움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고등학교와 대학을 마칠 수 있었고,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쉼터가 세워졌으며, 길거리에 나앉아야 할 처지의 극단이 든든한 공연장을 갖게 됐고,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제작에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선생은 “내가 돈을 벌었다면 결국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번 건데, 그 소중한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었다”고 사회 환원에 나선 이유를 설명한다.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뿌려 버리면 거름이 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는 그의 이야기는 돈에 관한 그의 철학으로 고스란히 포개진다.
이 다큐멘터리가 감동적인 건, 아낌없이 퍼주는 선생의 통 큰 기부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돈이 필요한 사람들 이야기를 들은 뒤 서랍 속 흰 봉투를 꺼내 몇십만원부터 몇천만원까지 넣어줄 때 별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10년간 매달 1천만원씩 적자를 보전해줬던 <진주신문>이 좀 더 사회의 불의와 싸우지 못하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편집 방향에 단 한번도 의견을 내지 않았다.
“아무도 칭찬하지도 말고 나무라지도 말고 그대로 봐주기만 하라고 말하고 싶다.” 훈계는 넘쳐나지만 존경은 희미해지고 있는 세상에서 진짜 어른이 무엇인지 곱씹게 하는 ‘어른 김장하’의 다큐 속 마지막 말이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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