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가족 신화 후려치는 파격적 블랙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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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진 거실.
연극 <히어> (Hir)는 일가족 4명이 펼치는 가족극의 외피를 둘렀으되, 사실은 발칙하고 선정적인 부조리극이다. 히어>
'정상가족'이란 신화에 던지는 질문 속에 젠더와 가부장, 공감과 소통, 교육과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편한 시선이 뒤섞여 있다.
극단 '풍경' 대표인 연출가 박정희는 "깔끔하게 정돈된 집안, 가장에게 순종하는 가족이란 개념부터 가부장적 제도에서 교육된 정상성이라고 보는 게 작가 테일러 맥의 시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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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진 거실. 연극 <히어>(Hir)는 일가족 4명이 펼치는 가족극의 외피를 둘렀으되, 사실은 발칙하고 선정적인 부조리극이다. 기존 통념에 통렬한 직사포를 난사하며, 주저 없이 선을 넘어버린다. 대담한 파격으로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 동시에 피시식 웃음을 자아낸다. 어둡고 처절한 내용인데 웃지 않을 수 없는 블랙코미디다. 2014년 미국 초연 당시 언론으로부터 떠들썩한 관심을 받았고, 전세계 70여개 제작사가 무대에 올렸다. 국내에선 이번이 초연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3년 만에 돌아온 해병 ‘아이작’은 난장판으로 변해버린 집안 꼴에 기절초풍한다. 배관공으로 일하던 가부장적인 아버지 ‘아놀드’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무기력한 피에로 신세다. 10대 여동생 맥신은 트랜스젠더 남성 ‘맥스’로 변모해 있다. 아버지를 대신해 헤게모니를 틀어쥔 어머니 ‘페이지’는 아이작과 사사건건 신경전을 펼친다.
어머니는 성별을 전환한 맥신을 ‘그’(Him)나 ‘그녀’(Her)가 아니라 둘을 합성한 성 중립 대명사 ‘히어’(Hir·그 사람)로 부르라고 한다. 원작자 테일러 맥(49)도 자신의 정체성을 여성, 남성, 논바이너리를 넘어선 ‘퍼포머’(공연자)로 규정한다. 배우로도 활동 중인 그는 미국 일간지 <뉴욕 타임스>와 잡지 <뉴요커>, <아메리칸 시어터>가 뽑은 ‘뉴욕 최고의 공연예술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연극은 어느 인물과 관계에 주목하느냐에 따라 포인트가 달라진다. 그만큼 인물들의 캐릭터가 중층적이고 다면적이다. ‘정상가족’이란 신화에 던지는 질문 속에 젠더와 가부장, 공감과 소통, 교육과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편한 시선이 뒤섞여 있다. 학교를 ‘다단계 사기’라고 외치며 집에서 홈스쿨링을 하고, 게이 남성과 퀴어들이 조직한 ‘래디컬 페어리’(Radical Faerie)를 이상향으로 꿈꾸는 맥스에게 ‘정상적 세계’는 비정상적으로 비친다. 극단 ‘풍경’ 대표인 연출가 박정희는 “깔끔하게 정돈된 집안, 가장에게 순종하는 가족이란 개념부터 가부장적 제도에서 교육된 정상성이라고 보는 게 작가 테일러 맥의 시각”이라고 말했다.
연극의 제목 ‘히어’(Hir)는 ‘여기’(Here)와 발음이 같다. 이 가족이 사는 ‘여기’는 폐기물 매립지에 합판으로 뚝딱뚝딱 지은 집이다. 붕괴 직전의 이 위태로운 집에서 예전에 가부장적이던 아버지는 쓰레기처럼 방치된다. 어머니 페이지는 이 집을 무너뜨리고, 가부장제를 뒤엎으며 새로운 전환을 꿈꾼다. 하지만 아직 어디로 가야 할지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채 아버지의 권위적인 모습을 닮아간다.
탈출구 없는 이 가족의 답답한 현실에서 희망의 불빛을 찾을 수 있을까. 마지막 ‘슬로 모션’ 장면에서 실마리가 엿보인다. 맥스가 흐트러진 옷가지를 정리하며 아버지를 다독이고, 페이지는 퀭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다. 박정희 연출은 “히어란 대명사는 젠더를 비롯한 온갖 규정과 족쇄를 벗어버린 원형의 인간을 상징한다”며 “원형적인 인간에 내재한 공감과 사랑에 주목하면서 이 연극을 만들었다”고 했다.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한 박명신과 김수현이 각각 페이지와 아놀드를 연기한다. 아이작은 홍선우, 맥스는 김하람이 맡았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아파트 ‘한남더힐’ 어귀에 있는 ‘더줌아트센터’에서 오는 29일까지 막을 올린다. 더줌아트센터는 한남더힐을 시행한 (주)한스자람의 후원으로 만들어졌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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