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이 ‘양자’에 꽂힌 이유…“AI·바이오 판도 바꿀 게임체인저”
양자, 미래 산업 이끌 기술로 평가받아
산업 생태계 구축, 인력 양성 등 필요해
윤석열 대통령이 올해 첫 해외 순방의 마지막 일정으로 양자(量子) 연구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났다. 윤 대통령은 19일(현지시각) 스위스 취리히연방공대에서 양자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들과 대담을 가졌다. 취리히연방공대는 아인슈타인을 배출하는 등 유럽 3대 물리학 연구기관으로 꼽힌다.
이번 해외 순방에서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을 자처한 윤 대통령이 마지막 일정으로 기업인이나 해외 정부 관료 대신 ‘양자 기술’이라는 생소한 물리학을 택한 이유는 뭘까.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은 “슈퍼컴퓨터에 비해 연산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양자 기술은 모든 산업, 안보에 혁신을 가져올 게임체인저로서 미국, 유럽연합(EU), 일본, 중국 간에 이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가속화되고 있다”며 “이번 방문을 통해 스위스가 양자 기술 강국이 될 수 있었던 성공 요인과 후발 주자인 우리나라가 취해야 할 전략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양국 과학자 간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주목하고 있는 양자 기술은 도대체 뭘까. 양자 기술의 경제적인 효과는 또 얼마나 대단할 걸까. 조선비즈가 전문가들을 만나 정리했다.
◇이유는 몰라도 활용은 가능한 양자 현상
양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가장 작은 단위의 에너지, 입자를 말한다. 빛을 구성하는 광자가 양자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양자는 현대 물리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특이한 성질을 갖는다. 양자가 갖는 대표적인 성질에는 중첩과 얽힘이 있다.
중첩은 양자의 여러 상태가 확률적으로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모든 물질이 한 번에 한 가지 성질만 갖는다. 가령 물은 기체·액체·고체 등 세 가지 상태로 바뀔 수 있지만, 한 순간에는 기체이자 고체로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양자는 직접 관측하기 전까지는 여러 상태로 동시에 존재하다가 관측한 이후에 하나의 상태로 정해진다.
얽힘은 아주 멀리 떨어진 두 양자가 동시에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현상을 말한다. 현대 물리학에서도 멀리 떨어진 두 물질이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지만, 빛의 속도를 뛰어 넘지는 못한다. 우리가 지구에서 수백광년 떨어진 거리의 별을 볼 수 있지만, 현재가 아닌 과거에 나온 빛을 보는 것도 이런 이유다. 그러나 양자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멀리 떨어진 양자라도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동시에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다.
이외에도 양자는 도약, 비가역성처럼 다양한 특성을 갖지만, 이들 모두 현대 물리학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양자를 관찰하거나 활용하는 것까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양자가 가진 고유의 특성을 연구하는 분야를 양자역학이라고 부르고, 양자를 활용해 기존 장비의 성능을 높이거나, 새로운 장비를 만드는 분야를 양자 기술이라고 부른다.
◇고부가가치 산업 신약·신소재 개발 빨라진다
양자 기술의 대표적인 사례가 양자 컴퓨터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양자 역학에서는 물질이 동시에 여러 가지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 양자 컴퓨터는 이런 양자의 성질을 이용해 계산능력을 월등하게 높인 것이다. 기존의 컴퓨터는 전자가 없거나 있는 것을 0과 1로 표현한다. 1비트(bit)라고 부르는 단위다. 반면 양자 컴퓨터는 0과 1이 중첩돼 있기 때문에 성능이 좋아질수록 계산능력이 상상을 초월하게 빨라진다. 양저 컴퓨터에서 0과 1이 중첩된 상태를 큐비트(qubit)라고 부르는데, 구글이 2019년에 만든 53큐비트의 양자 컴퓨터는 슈퍼컴퓨터가 1만 년은 걸릴 계산을 3분만에 끝냈다. IBM은 올해 말까지 1000큐비트의 양자 컴퓨터를 내놓겠다고 하고 있다.
양자 컴퓨터에 주목하는 건 다른 고부가가치 산업인 신약, 신소재 개발의 속도를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약과 신소재처럼 새로운 물질의 개발은 수천 종 이상의 후보물질을 시험해 필요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물질을 찾는 것으로 시작한다. 과거에는 후보물질을 추려내기 위해 모든 물질을 실험해야 했지만, 최근에는 컴퓨터를 이용한 모델링 계산으로 실제 실험을 대신하는 방식이 활용되고 있다. 신물질을 개발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실험 속도와 관계 없이 모델링의 정확도와 연산 속도로 결정된다.
실제로 슈퍼컴퓨터와 인공지능(AI) 알고리즘이 도입되면서 연산 속도는 빨라지고, 신물질 개발 시간은 비약적으로 짧아지고 있다. 최대 10년이 걸리던 후보물질 발굴은 수개월만에 할 수 있게 됐다. 양자 컴퓨터가 발전하면 각종 산업에 그만큼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셈이다.
한상욱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양자정보연구단 단장은 “물질은 상호작용할 때 양자역학적인 현상이 함께 일어나지만, 현재 컴퓨터 기반의 모델로는 이를 계산하거나 표현할 수 없다”며 “양자역학을 기반으로 한 모델링을 만들려면 양자컴퓨터의 개발이 필요하고, 신약과 신소재 개발의 패러다임이 바뀔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상용화까지 갈 길 멀지만 생태계 구축 서둘러야
양자 통신과 암호는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중국은 지난 2017년 2000㎞ 길이의 광케이블을 통한 양자암호통신을 구축해 양자암호통신 위성과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통신 신호는 기존과 같은 방식을 활용하지만, 암호를 걸거나 푸는 데 필요한 암호키에 양자 기술을 적용하는 방식이다.
양자를 신호로 활용하는 진정한 의미의 양자 통신은 아니지만, 양자 기술을 활용한 장비 개발, 기업 성장 등 양자 기술 생태계를 마련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도 통신기업 SKT와 KT를 중심으로 양자암호통신 서비스에 필요한 플랫폼을 만들고 있다.
양자 센서도 상용화된다면 산업계에 큰 파장을 미칠 수 있다. 기존 센서로는 측정할 수 없는 아주 작은 변화나 입자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론적으로는 미세 중력의 변화까지도 측정할 수 있다. 황찬용 한국표준연구원 양자기술연구소 소장은 “중력의 변화를 측정할 수 있다면 일반 레이더로는 잡을 수 없는 소형 드론을 포착하거나, 우주 산업에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양자 기술은 현재 전 세계 각국에서 전략 기술로 지정돼 공동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미래 기술로 꼽히는 양자 기술을 개발하고,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자체적인 기술력 확보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과학계에서는 양자 기술이 미래 산업의 판도를 바꿀 강력한 도구라는 점에 동의하지만, 실제 상용화를 통해 경제성을 보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한 단장은 “양자 기술을 선도하는 해외 기업에서는 5년 후에 양자 기술을 이용한 제품을 내놓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상용화 수준에 도달하는 데는 30년 이상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며 “다만 양자 기술이 가진 강력한 힘을 생각했을 때 장기적인 투자는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양자 기술 자체를 발전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산업·인력·장비 등 생태계 구축에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황 소장은 “양자 기술을 선도하는 미국과 중국은 산업계를 중심으로 연구가 이뤄져 기반 산업이 함께 발전하고 있다”며 “한국은 인력이 부족하고 산업 생태계가 만들어지지 않아 기업이 양자 기술에 투자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양자를 12대 국가전략기술에 포함하고 대대적인 연구 개발에 나설 계획이다. 양자 기술 분야에는 올해 984억원을 지원하고, 2조원 규모의 양자 기술 산업 예비타당성조사를 신청해 본격적인 투자에 나설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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