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록으로 보는 축구 황제 펠레의 유산 [경기장의 안과 밖]

배진경 2023. 1. 20. 0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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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의 안과 밖] 펠레는 축구를 새롭게 정의한 인물이다. 네이마르의 말대로 “그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마법은 남을 것이다. 펠레는 영원하다.”
네 차례 월드컵에 출전한 펠레는 브라질의 세 번 우승을 이끌었다.ⓒREUTERS

‘축구 황제’ 펠레가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9월 대장암 수술을 받은 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투병하다 2022년 12월30일 병상에서 눈을 감았다. 펠레 사망 소식에 그의 조국 브라질은 슬픔에 잠겼다. 세계 축구계는 일제히 그를 추모했다. 일주일이 넘도록 애도 분위기는 가라앉지 않고 있다. 그에 대한 찬사와 헌사는 수천 가지로 돌고 돌지만, 결국 네이마르(브라질)가 자신의 SNS에 남긴 메시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펠레 이전에 ‘10번’은 하나의 번호에 불과했다. 펠레 이전에 축구는 단순히 스포츠에 불과했다.”

펠레는 축구를 새롭게 정의한 인물이다. 반세기 넘도록 전설로 살았던 펠레의 신화는 이제 지상에서 영원으로 향한다. 생전 펠레가 남긴 말을 통해 그의 현역 시절 활약상과 축구 유산을 정리했다(본문의 펠레 어록은 모두 〈포포투〉 과거 인터뷰에서 발췌함).

“모두 나를 펠레라고 불렀다. 그 이름이 싫어서 싸웠다.”

지금은 한 사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자 ‘황제(O Rei)’를 의미하는 대명사로 인식되지만, 펠레의 진짜 이름은 따로 있다. 에지송 아란치스 두 나시멘투. 펠레의 아버지가 미국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을 열렬히 존경한 나머지 그 이름을 따서 지어준 것이었다. 펠레의 아버지는 상파울루주의 바우루 팀에서 뛰던 공격수였는데, 그 팀의 골키퍼 이름이 빌레였다. 학창 시절 친구들이 그 비슷한 발음인 ‘펠레’라는 별명으로 그를 부르기 시작했던 게 최초의 기억이다. 펠레는 “에지송이라는 이름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펠레라고 불리는 게 싫었다”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펠레라는 이름으로 굳어진 이후 인생이 달라졌다. 축구계에서 펠레라는 이름은 축구와 동의어다.

“길거리에서 축구를 하면 좁은 공간에서 네댓 명, 많게는 열 명의 선수와 겨룬다. 빠른 판단력을 습득할 수 있다.”

브라질에서 펠레는 ‘성공한 흑인’의 표상이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의 후손이 인구의 절반을 넘어선 지금도 브라질에는 인종차별과 흑백 갈등이 존재한다. ‘펠레 시대’에는 더했다. 펠레는, 흑인들에게 금지된 부와 권력의 정상에 서는 것으로 인식을 바꿔놓았다. 17세에 세계 챔피언이 됐고, 일찌감치 ‘축구 황제’라는 칭호를 얻었다.

펠레는 상파울루 바우루 지역의 빈민가에서 나고 자랐다. 처음 축구를 시작할 때도 축구공을 살 형편이 되지 않을 정도로 가난했다. 어머니 양말 속에 신문지를 넣어 공을 만들어 놀았다는 이야기는 실화다. 그의 말에 따르면 “코코넛으로 축구를 할 때도 있었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불우한 환경은 특별한 기술을 만드는 배경이었다. “제대로 찰 수 없어 드리블만 하고 놀았다”라는 말이 힌트다. 좁은 골목에서 볼을 컨트롤하며 여러 명을 제치거나 따돌리려면 섬세한 발 기술이 필요했다. 놀이하듯 ‘길거리 축구’를 반복하면서 볼 컨트롤과 개인기 향상을 경험했다. 흔히 펠레를 타고난 재능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펠레는 “내 평생 가장 중요한 일은 연습이었다”라고 말했다.

천재성에 노력을 더한 결과, 그는 17세에 1958년 생애 첫 월드컵에 참가했다. 소련과의 조별 3차전에서 최연소 월드컵 출전선수가 된 펠레는 8강전에서 웨일스를 상대로 만 17세 239일의 나이로 골을 넣어 역대 최연소 득점자로 이름을 올렸다. 프랑스와 준결승전에서는 해트트릭을 기록해 이 부문 역시 최연소(만 17세 244일) 기록을 보유했다. 득점 행진은 결승까지 이어졌다. 스웨덴을 상대로 두 골을 넣었는데, 만 17세 249일로 최연소 월드컵 결승전 출전 기록과 결승전 득점 기록을 동시에 만들었다. 이날 후반 10분 펠레가 상대 수비수의 키를 넘긴 뒤 시도한 로빙슛 득점은 이후 50여 년간 ‘월드컵 최고의 골’ 중 하나로 회자된다. 펠레의 활약을 등에 업은 브라질은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4년 뒤 칠레 월드컵에서도 펠레는 원맨쇼를 펼쳤다. 멕시코와 첫 경기에서 팀의 첫 골을 도왔고, 두 번째 골을 직접 득점하는 것으로 팀의 2-0 승리를 주도했다. 수비수 4명을 제치는 드리블 돌파로 완성한 골이었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전에서 부상을 당하며 대회를 끝까지 소화하지는 못했다. 부상 대신 월드컵 2연패를 보상으로 얻었다.

펠레와 가린샤를 축으로 하는 브라질의 4-2-4 포메이션은 특히 유럽에서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다. 역설적으로 이런 공격 축구를 막기 위한 수비 전술도 등장했다. 이탈리아가 제시한 수비 전술 카테나치오(빗장 수비)다. ‘펠레 덕분에 카테나치오가 탄생했다’는 해석은 과장이 아니다. 이제 펠레는 모든 팀에게 경계 대상이었다. 1966년 월드컵은 악몽이었다. 첫 경기부터 집중 견제의 표적이었다. 불가리아전에서 상대 선수에게 강하게 차이며 다치는 바람에 두 번째 경기에선 뛰지 못했다. 3차전이던 포르투갈전에 겨우 복귀했지만 폭력적인 태클이 난무했다. 부상을 당한 펠레는 경기를 끝까지 소화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선수교체 제도가 없었기에 브라질은 수적 열세 속에서 싸워야 했다. 결국 1-3으로 패했다. 펠레는 “다시는 대표팀에서 뛰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

펠레의 대표팀 은퇴 선언은 4년 뒤 번복됐다. 펠레의 복귀는 국민적 염원에 가까웠다. 1970년 월드컵 대표팀으로 돌아온 펠레의 결말은 모두가 아는 대로 역사가 됐다. 이 대회에서 펠레는 매 경기 공격포인트를 기록했고, 결승전에서 이탈리아를 맞아 타점 높은 헤더로 선제골을 넣었다. 이날 4-1로 승리한 브라질의 마지막 골은 축구로 만든 예술의 정점이었다. 공이 거의 모든 브라질 선수를 거쳤고, 펠레가 가볍게 밀어준 볼을 알베르투가 골로 완성했다.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통산 세 번째 우승을 달성한 브라질은 우승 트로피인 줄리메컵을 영구 소장하게 됐다. 월드컵에서 세 차례 우승컵을 들어 올린 선수는 펠레가 유일하다.

“페널티킥으로 만든 1000번째 골, 하늘이 만들어준 상황이었다고 믿는다.”

펠레는 현역 시절 경이로운 득점 활약을 펼쳤다. 1956년 브라질 산투스에서 데뷔해 1977년 뉴욕 코스모스(미국)에서 은퇴하기까지 21년간 1281골을 기록했다. 한 해 평균 60골을 상회하는 기록이다. 양발을 자유자재로 놀리던 선수답게 양발을 활용한 드리블에 이은 득점, 바이시클 킥으로 만든 골, 놀라운 체공력을 이용한 헤더 골 등 득점 방식도 다양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1000번째 골이 페널티킥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브라질의 한 매체가 기막힌 해석을 내놓았다. “펠레의 1000번째 골을 보기 위해 세상이 잠시 멈춰야 했기에 하늘이 그런 상황을 만들어줬다.”

“하늘은 내게 세 번이나 최고의 순간을 줬다.”

펠레의 축구 인생을 챕터별로 정리하면, 그는 늘 챔피언의 자리에서 한 장을 마무리했다. 1970년 자신의 마지막 월드컵을 우승으로 장식한 뒤 대표팀에서 은퇴했고, 1974년 산투스에서는 리그 우승을 확정하고 득점왕에 오른 뒤 브라질을 떠났다. 펠레는 10대 시절 그에게 프로의 문을 열어준 산투스에서 ‘원 클럽 맨’으로 활약했는데, 유럽에서 수차례 거액의 오퍼를 제시해도 모두 거절하고 팀에 남았다. 산투스에서 일단락한 축구 인생은 미국에서 연장됐다. 펠레의 말에 따르면 “‘풋볼’이 인기를 누리지 못하는 미국에 ‘사커’를 홍보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뉴욕 코스모스가 제시한 거액의 연봉을 외면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펠레의 연봉은 출처에 따라 200만 달러에서 400만 달러로 다르게 나오지만, 어느 쪽이든 1970년대 물가를 고려하면 엄청난 액수였다. 펠레의 등장에 미국 프로축구에 중계가 붙었다. 펠레는 코스모스에서도 우승컵을 들어 올린 뒤 팀을 떠났다. 당시 펠레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최선을 다해 모든 준비를 하겠으니 제발 챔피언인 채로 은퇴하게 해주십시오.”

세상과 작별한 순간에도 펠레는 챔피언의 권위를 유지했다. 네이마르의 말대로 “그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마법은 남을 것이다. 펠레는 영원하다”.

배진경 (전 ⟨포포투⟩ 편집장)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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