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저희와 함께 보내실래요?
김선영 (칼럼니스트)
〈어른 김장하〉(MBC경남 유튜브, 2부작 다큐멘터리)
제목만 보면 대뜸 낯설다는 생각 먼저 든다. ‘김장하’라는 이름 석 자가 그렇고, 그 낯선 인물을 소개하는 수식어가 지극히 평범한 ‘어른’이라 더 그렇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를 다 보고 나면 ‘이보다 적절한 제목은 없다’는 생각으로 바뀐다. 진정한 어른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에, 오로지 경이로운 삶의 행적만으로 참 어른의 의미를 일깨워준 인물이 김장하 선생이기 때문이다.
1973년, 경상남도 진주시 동성동에 한약방을 연 뒤, 평생 나눔을 실천해온 그는 지역사회에서 이미 존경받는 유명 인사였다. 명신고등학교 설립과 국가 무상 헌납, 지역 언론 후원, 남성문화재단을 통한 지역사회 역사문화 발굴 지원, 차별을 없애는 형평운동 주도 등 굵직한 업적 외에도 그의 봉사가 미치지 않은 영역이 없을 정도다. 그 막대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본인을 드러내는 것은 극구 사양해, 매체 인터뷰 한번 한 적이 없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는 그의 큰어른다움에 매료돼 평생의 발자취를 추적해온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기자가 김현지 PD(MBC경남)의 협조를 받아 오랜 취재기를 정리한 방송이다.
‘주인공’이 전면에 나서지 않았음에도, 김장하 선생의 도움을 받아온 수많은 이들의 적극적 증언과 도움이 뒷받침되어 결과적으로 더 특별한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졌다. 익명 기부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나눔 행적들이 그에게 도움받은 이들의 릴레이 증언을 통해 하나씩 취재 과정에서 밝혀지는 순간은 정말이지 놀랍고 감동적이다.
그 많은 증언에 나타난 공통된 표현은 ‘본받고 싶은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김장하 선생이 무슨 지침을 주거나 조언을 한 것도 아니지만, 그냥 살아온 모습 자체가 지켜봐온 이들에게 ‘삶의 지표’가 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닮고 싶어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우리 시대 어른이 아닌가”라는 김주완 기자의 말은 김장하 선생의 숭고한 삶이 뒷받침되었기에 가슴 깊숙이 다가와 박힌다. 다소 빛바랜 말이 되어버린 ‘선한 영향력’이라는 단어를 다시금 살아 있는 말로 만드는 위대한 삶이자 기적 같은 다큐다.
〈지구상의 위대한 국립공원〉(넷플릭스, 5부작 다큐멘터리)
설 연휴에 모든 세대가 함께 공감하며 볼 수 있는 콘텐츠로 자연 다큐멘터리만 한 장르가 또 없다. 안방을 순식간에 대자연의 한가운데로 옮겨주는 경이로운 영상미와 치열한 생존의 드라마부터 경이로운 성장기까지 다양한 동물들의 역동적인 스토리는, 누구에게나 하나씩은 꼭 몰입할 만한 순간을 만들어낸다. 심지어 다큐멘터리의 안내자가 지구에서 가장 익숙한 얼굴 가운데 하나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지구상의 위대한 국립공원〉은 완성도도 뛰어나지만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내레이션을 맡아 더 큰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지난해 이 작품으로 에미상 시상식에서 ‘우수 내레이션 상’을 받았다. “하나우마만은 제가 좋아하는 곳입니다. 전 하와이에서 자랐어요. 이곳은 제 뒷마당이나 다름없었죠. 이곳에서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싹텄습니다.” 본인의 경험을 들려주며 친구와 대화하듯 이야기 속으로 안내하는 오바마 전 대통령의 생동감 넘치는 내레이션은 다큐멘터리에 활기를 더해주면서도 동시에 환경보호와 같은 메시지에도 확실한 힘을 실어준다.
5부작으로 구성된 다큐멘터리는 칠레 파타고니아, 케냐 차보, 인도네시아 구눙 레우스르, 미국 몬터레이만 국립해양보호구역 등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국립공원들을 찾아가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함께 이곳을 지키기 위한 지역사회와 환경운동가들의 노력을 담아낸다. 2018년 공개돼 호평받은 넷플릭스의 또 다른 자연 다큐 〈우리의 지구〉가 기후재난 시대에 대한 절박한 각성의 외침을 전달한다면, 〈지구상의 위대한 국립공원〉은 자연 복원의 사례들을 중심에 놓으며 좀 더 희망 섞인 메시지로 “당장 행동할 것”을 요청한다. 최근 기후위기 담론이 경고에서 실천의 강조로 변화하고 있는 양상을 반영한 다큐멘터리다.
“우리는 지구온난화의 파장을 직접 실감하는 첫 세대이며 해결의 물꼬를 틀 수 있는 마지막 세대”라는 오바마 전 대통령의 말은 모든 연령대를 지구조별 과제의 같은 구성원으로 묶어준다. 1년 중 쓰레기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명절 연휴에 함께 짐을 나눠서 지면 어떨까.
〈죠르디입니다〉(카카오TV, 20부작 숏폼 애니메이션)
최근 콘텐츠계의 주요 트렌드 중 하나는 ‘숏폼’의 부상이다. SNS가 동영상 플랫폼 역할까지 담당하면서, 강렬한 장면만 잘라낸 영상 클립이 아예 완벽한 기승전결을 갖춘 에피소드 숏폼으로 진화하는 추세다. 숏폼의 유행에 애니메이션 시장도 활기를 띠고 있다. 어린이들이 주 시청층이었던 애니메이션이 MZ 세대가 활발하게 소비하는 숏폼 형식을 만나 좀 더 확장된 소재와 스토리를 선보일 수 있게 됐다.
카카오TV가 제작한 숏폼 애니메이션 〈죠르디입니다〉가 대표적 사례다. 3분 내외 분량의 20개 에피소드로 구성된 〈죠르디입니다〉는 ‘취준생’의 고민을 담아낸 이야기로 고용불안 시대의 청년층을 공략한다. 카카오프렌즈 니니즈 캐릭터 중 공룡 ‘죠르디’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가 취업을 준비하는 동안 편의점, 레스토랑 등 각종 아르바이트를 섭렵하며 고충을 겪는 모습을 담아냈다. 판타지 세계관 속의 귀여운 캐릭터이지만, 현실적인 애환을 녹여낸 ‘짠내 나는 일상’이 공감을 이끌어낸 덕에 죠르디는 취준생의 아이콘이 됐다. 평균 분량 3분, 모든 에피소드를 몰아서 본다 해도 한 시간이 채 소요되지 않는다.
“취직 준비는 잘 돼가니?” 명절에 청년들이 가장 기피하는 질문을 조심성 없이 던지는 어르신들이 있다면 동반 시청 또는 영상 공유를 권유한다.
변정수 (미디어 평론가)
〈붉은 단심〉(웨이브·왓챠, 16부작 드라마)
얼핏 진부한 궁중 멜로로 오인되기 쉽지만, 실은 이 장르의 문법을 다시 쓰다시피 했다고 평가할 만한 신선한 시도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주요 인물 간의 정치적 대립은 첨예하지만 이 장르라면 으레 짐작하게 마련인 ‘암투’도 ‘음모’도 없고, 정적에게 공격의 빌미가 될 약점을 한사코 들키지 않으려는 전전긍긍으로 스토리를 채우지도 않는다. 카드게임에 비유하면 ‘패를 다 보여주고 치는’ 셈이다. 대단원을 준비하는 회심의 ‘히든카드’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조차도 허무할 만큼이나 빠르게 전모를 드러낸다. 악당은 야비한 정치 공작에 골몰하는 대신 함부로 무시해버리기 어려운 명분을 앞세운 정공법을 구사한다. 따라서 주인공들도 ‘역공작’을 펼치는 무리수로 위기를 자초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 남는 것은 대립되는 캐릭터들이 상징하는 ‘정치적 비전’들 사이의 정면승부뿐이다.
이 전형적인 ‘남성적 서사’를 주도적으로 끌고 가는 중심인물이 여성이라는 점도 중요한 성취다. 물론 ‘선한 의지’와 ‘역경에 굴하지 않는 강인함’을 겸비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궁중 멜로는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가령 〈대장금〉이나 〈동이〉가 지금 여기의 남성 중심적 질서를 전혀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면, 이 드라마의 주인공 유정(강한나)은 그 질서 자체에 도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확실히 업그레이드된 캐릭터이다. 덧붙여, 더 주목해야 할 인물은 ‘빌런’ 가연(박지연)이다. ‘자의식 있는 악당’ 박계원(장혁)과 대비되는 ‘광기’가 유서 깊은 여성 폄훼의 되풀이로 보일 수도 있지만, 기성 질서가 부여한 권력을 휘둘러 오로지 ‘그 질서를 부수기 위해’ 폭주한다는 설정이 유례를 더듬기 어려울 만큼 전복적이기 때문이다.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잘 뜯어보면) ‘중종의 첫 왕후 신씨가 폐위되지 않았다면’이라는 상상에 기초한 대체 역사물로서의 재미도 쏠쏠
〈카이로스〉(웨이브·왓챠, 16부작 드라마)
멀리는 〈블랙〉(2017)에서 가까이는 〈미씽〉(2020, 2023)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참사의 진실을 밝히려 배후를 추적하거나 피해자의 해원을 통해 위로를 건네는 적잖은 ‘포스트-세월호 서사’들 가운데 서사적 완성도 면에서 가장 뛰어나지만, 그 의미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해 아쉬운 작품이다.
이 드라마의 매력은, 과거를 바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타임슬립 장르의 문법을 충실히 따른다는 데 있다. 하지만 〈시그널〉(2016)이나 〈터널〉(2017)처럼 10년을 훌쩍 넘는 먼 과거가 아니라 딱 한 달의 시차를 둔 전개가 긴박감을 극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색다른 재미를 준다. 과거의 시점에서 보자면 먼 미래는 아예 딴 세상이지만 고작 한 달 뒤는 손에 잡힐 듯 아슬아슬하게 다가오기도 하고, 다른 변수가 개입할 여지가 적은 탓에 인과관계가 더 직접적으로 분명하기도 한 까닭일 테다.
또한 ‘어머니의 실종’과 ‘딸의 유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계기로 공조하게 된 두 주인공의 연결고리가 20년 전의 붕괴 사고였다는 것이 나중에야 드러나면서 그 진실을 추적하는 사회적 시선이 열리는 구도 덕분에 후반으로 갈수록 서사의 밀도가 높아진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강렬한 도입으로 기대를 모았다가 뒷심이 달리는 통에 뻔한 신파로 추락하곤 하는 함정을 비껴간 비결이다. 〈시크릿가든〉(2011)에서 로맨스를 매개했던 ‘아버지의 음덕’이라는 모티브를 묵직한 질감의 사회물로 빚어낸 상상력도 음미할 대목이다.
*기존 이미지에서 벗어나 보이시한 매력을 선보인 배우 이세영의 재발견은 보너스
〈아스달 연대기〉(넷플릭스·티빙, 18부작 드라마)
저조한 흥행 성적 탓에 작품성을 평가받을 기회를 놓친 ‘저주받은 걸작’으로, 올해 ‘시즌 2’가 예고된 드라마들 가운데 가장 기대가 큰 작품이다.
이 드라마의 작가 김영현·박상연 팀은, 그동안 〈선덕여왕〉(2009), 〈뿌리 깊은 나무〉(2011), 〈육룡이 나르샤〉(2016) 등 명작들을 통해 ‘정치의 본질은 무엇이고, 권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질문하며 딱딱한 ‘정치학 교과서’를 흥미진진한 대중 서사로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이 작품은 여기에서 한발 나아가 ‘권력은 어떻게 형성되며, 국가와 같은 정치단위는 어떻게 발명되는가’라는 더 근원적인 주제를 판타지 서사에 담아내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그 시도가 과연 성공했는지는, 고작 한 시즌의 도입부만으로는 함부로 단언할 수 없다. 다음 시즌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도 그래서다.
따라서 〈왕좌의 게임〉 시리즈 등의 장르 문법에 익숙한 시청자들이 이 문법에 기대서 완성도를 의심하는 것이 썩 온당치는 않다. 그렇다고 전작들에 갈채를 보낸 시청자들이 우호적인 것도 아니었는데, 거꾸로 역사적 배경을 익히 알고 있는 무대가 아닌 언제인지 어디인지조차도 불분명한 신화적 분위기의 시공간이 낯선 나머지 자연스러운 몰입을 방해한 탓일 테다. 이는 역설적이지만 전작들의 성공적 흥행도 정작 작가들이 야심차게 던진 질문들의 사회문화적 가치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뜻일지 모른다.
달리 말해 통속 역사물 애호가는 물론이려니와 신화적 판타지 마니아에게 이 드라마를 권하는 건 꽤 무모한 만용일 수 있다. 다만 권력을 둘러싼 쟁투의 심연에 도사린 게임의 법칙을 간취해내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본격 정치 드라마’의 덕후들에게라면 충분히 매혹적인 흡인력을 발휘하리라 믿는다.
*각 편 에필로그로 덧붙인 ‘쿠키’에 핵심 메시지가 농축되어 있으니, 크레디트 올라간다고 긴장을 풀면 낭패
김선영 (칼럼니스트)·변정수 (미디어 평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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