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스승은 설명하지 않는다···지적 해방으로 성장하는 길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근조근 얘기해 봅니다. 다수의 철학서를 펴내기도 한 진은영 시인이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 제목만 보면, 스승이 무지할 경우 학생들에게 어떤 악영향을 미치고 얼마나 심각한 교육적 폐해를 낳는지에 대해 쓴 책일 것만 같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이 책은 좋은 스승은 무지한 스승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역사적 실례를 소개한다.
1818년 프랑스인 조제프 자코토는 네덜란드 남부에 있는 루뱅 대학에서 프랑스어 강의를 맡게 되었을 때 눈앞이 캄캄해졌다. 네덜란드어를 한마디도 못 하는데 어떻게 프랑스어를 가르친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그만둘 수도 없었다. 정치적 망명 뒤에 어렵게 얻은 일자리였기 때문이다.
그가 선택한 교재는 '텔레마코스의 모험'. 한 면엔 프랑스어 원문이, 다른 면엔 네덜란드어 번역문이 나란히 실려 있는 대역본이었다. 원래 이 책은 언어 천재로 명성을 떨친 페늘롱 주교가 루이 14세의 손자를 가르치기 위해 쓴 교재이다. 왕은 백성을 위해 자신을 무조건 희생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담고 있다는 점이 자코토의 마음에 들었다. 문제라면 그가 네덜란드어로 문법을 설명하는 건 고사하고 책을 펼치라는 간단한 의사 표현도 하기 힘들다는 것.
자코토는 통역 일을 한 적이 있는 네덜란드 학생에게 부탁해서 교재의 프랑스어를 먼저 읽게 하고 다른 학생들은 그것을 네덜란드어 번역과 스스로 대조해가면서 반복하여 쓰고 외우게 했다.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자구책이었지만, 놀랍게도 한 학기가 지나자 프랑스어를 전혀 몰랐던 학생들이 문법 규칙을 이해하고 프랑스어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통념대로라면 교사는 설명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설명 한마디 없이 학생들이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니! 자코토는 새로 발견한 교육법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낯선 것을 연관시키고 기억력을 발휘하는 것만으로도 외국어를 배울 수 있다면 다른 것들을 배우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는 같은 방식으로 학생들에게 문학, 그림, 수학, 히브리어, 아랍어 등도 가르쳤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제 이 방법으로 가정교사를 두거나 학비가 비싼 학교에 갈 수 없는 가난한 아이들도 충분히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몹시 행복해졌다. 이 방법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는 교육법이라는 뜻에서 ‘보편교육’이라고 불리게 된다.
랑시에르는 자코토의 사상에 감동받아 '무지한 스승'을 썼다. 그가 특히 주목한 것은 보편교육이 전제하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지적 평등’의 원리였다. 학생이 교사의 설명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면 늘 교사보다 지적으로 열등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기들은 교사 없이도 모국어를 배우지 않는가. 설명할 때만, 그리고 설명해준 것만 아는 사람은 설명자에 예속된 존재이다. 혼자서 자신의 고유한 방식과 자신에게 맞는 속도로 배울 수 있을 때 그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좋은 교사는 유식한 자가 아니라 해방된 자를 만드는 교사이다.
가령 시를 가르칠 때 교사는 학생들이 시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고 그 대화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전문가의 시 해석을 미리 알려주지 않는 사람, 학생이 시에서 읽어낼 의미를 앞서 정하지 않는 사람, 그래서 학생이 배우게 될 어떤 것에 무지한 사람, 다시 말해 무지한 스승으로 남아야 한다. 그는 학생이 주의를 기울여 알아낸 것이 무엇인지 계속 물어봐 주고, 학생의 말에 경청하기 위해서 곁에 머물 뿐이다. 랑시에르는 이것을 예술가의 ‘해방하는 수업’이라고 부른다.
평등이 필요한 것은 시인과 독자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은 독자들이 제삼자의 설명 없이도 작품에 공감하고 자신들의 고유한 시선으로 그것을 읽어주길 기대한다. 시인 자신이 누군가의 설명 없이 사물과 직접 만나며 배운 것을 작품으로 썼듯이 말이다.
그런데도 난 시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다면, 자코토의 말대로 해보라. “배우라, 되풀이하라, 모방하라, 번역하라, 문장을 뜯어보라, 다시 붙여보라.” 그렇게까지 할 마음은 없다고 당신은 말할지도 모른다.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나는 못 하오’는 ‘나는 하고 싶지 않소. 이런 수고를 내가 왜 하오?’”를 뜻할 뿐이다. 그런 마음이라면 시집은 덮어도 된다. 다만 당신이 정말 원하는 것을 배우려 할 때 이 무능력(나는 할 수 없다, 나는 이해를 잘 못한다)이라는 속임수를 마음에서 떨쳐내라. “이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이야기할 것만 있다.” 이제, 용기를 가지고 그 이야기를 시작하라.
진은영 시인 (한국상담대학원 대학교 문학상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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