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현실에서 길러내 SF 미스터리···더 넓어진 미야베 미유키의 세계
2009년부터 10년간 쓴 단편 8편 묶어
아동학대, 노인소외, 감시사회 등 다뤄
예리한 통찰력에 SF적 상상력 더해져
'화차' '이유' '모방범' 등으로 한국에도 탄탄한 팬덤을 가진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거장 미야베 미유키(63). 신용불량자를 양산하는 모순적 사회 구조 등을 다루는 '미야베 세계'의 미스터리는 다분히 일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래서 더 서늘하고 몰입감도 높다. 일상성을 중심축으로 둔 작가가 쓴 SF 소설은 어떤 색깔을 보여줄까. 이달 국내에 발행된 그의 첫 SF 소설집 '안녕의 의식'에 눈길이 간 이유다.
소설집은 1987년 데뷔한 미야베 작가가 정면으로 SF에 도전한 결과물이다. 2009년 SF 앤솔러지 잡지('NOVA') 기고를 계기로, 작가는 매년 1편꼴로 꾸준히 SF 소설을 썼다. 그중 8편의 단편을 한데 모았다. 작가의 과거 인터뷰에 따르면, 제18회 일본 SF대상 수상작인 '가모우 저택 사건'(1997)에 대해 작가는 SF소설이라기보다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시간여행이란 장치를 사용한 'SF적' 소설 정도로 여긴다. 이번 소설집이 본격적 '미야베 SF'의 시작인 셈이다.
책은 미야베 SF소설의 10년간 변화를 담고 있다. 예컨대, 수록작 중 가장 먼저 쓰인 단편 '성흔'은 공포 판타지와 SF의 경계선에 서 있다. 추리소설처럼 보이는 전반부는 기존 미야베 작품들을 떠올리게 하지만, 중반부를 넘어서면 초월적 존재에 대한 상상력이 가미되면서 색다른 SF소설로 읽힌다. ('성흔'은 이전 소설집 '눈의 아이'(2013)에 수록됐지만, SF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쓴 첫 소설이라서 이번 소설집에도 포함시켰다고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설명했다.)
그런가 하면 표제작 '안녕의 의식'이나 '보안관의 내일' '전투원'은 장르적 특성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오랜 세월 자신의 집에서 "일해줬던" 노후 로봇과 작별 인사하는 서사('안녕의 의식')부터 망자를 꼭 닮은 의체에 고인의 인격을 담은 인공지능을 탑재한 '회귀자'들의 마을('보안관의 내일'), 혼자 나타났다 사라지고 이동하는 방범카메라라는 설정('전투원')까지. SF소설가로서 조금 더 과감해진 미야베를 볼 수 있다.
동시에 변함없는 미야베 소설의 진수도 확인된다. 잔인한 현실에서 소설의 세계를 끌어내는 작법이다. 예컨대 첫 작품 '성흔'과 마지막 집필작인 '엄마의 법률' 모두 아동학대 문제를 다뤘다. 작가가 10년이 흘러도 해결되지 못한 어두운 현실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전자는 열네 살 때 생모와 그의 동거남을 살해한 아동학대 피해자 '가즈미'와 그를 초월적 존재로 만들어가는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 이야기다. 후자는 학대받은 아이에게 친부모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기억 침전화' 조치를 취한 후 이들을 양부모에게 보내거나 국가 시설이 관리하는 일명 마더법을 둘러싼 갈등을 그렸다.
다른 수록작들에도 무차별 살상사건, 노인소외, 감시사회 등 일본은 물론 한국 사회도 직면한 문제들이 녹아 있다. 현실에서 한 걸음 떨어진 SF라는 장치 덕분에 오히려 더 선명한 우리의 자화상을 만난다.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재미는 덤이다.
여기에 작가의 '무심함'도 독특한 색을 더한다. 2019년 일본 현지에서 진행한 '안녕의 의식' 출간 기념 인터뷰에서 미야베는 "젊었을 때는 노력하면 어떻게든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이가 들고 보니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며 그런 면이 소설에도 묻어 있다고 인정했다. 비관론이나 패배주의에 젖어들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작가의 무심한 시선이 복잡하게 얽힌 세계를 여러 시각으로 차분하게 직조해 내는 데 힘이 된다. 섬세하게 짜여진 소설의 세계는, 독자를 한층 더 진실에 가깝게 데려간다. 작가의 첫 SF 도전은 그렇게 '미야베 세계'를 넓힌 듯하다.
진달래 기자 az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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