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고 가난한 여성' 400명 연쇄 살해..."시신만 있고 범인은 없다"[세계의 콜드케이스]

권영은 2023. 1. 20.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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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멕시코 후아레스 여성 연쇄 살인 사건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법의학자들이 2018년 10월 멕시코 후아레스의 산 라파엘 공동묘지에 미확인 시신을 묻고 있다. 로이터 게티이미지뱅크

"여기에 시체를 버리지 마시오!"

2004년 멕시코 치와와주(州) 국경 도시 후아레스의 골목길 전봇대에 섬뜩한 경고문이 붙었다. 쓰레기도 아닌 시체라니.

후아레스는 2000년대 후반 마약 카르텔에 장악돼 '마약 도시'로 악명을 떨쳤다. 그 전엔 '여성 살해의 수도'였다. '시체 투기 금지'란 전대미문의 경고문이 등장할 정도로 수많은 여성들이 죽어나갔다. 1993~2005년 후아레스에서 젊은 여성 최소 400여 명이 실종됐다 숨진 채 발견됐다.

정확히 얼마나 많은 여성이 살해됐는지 아무도 모른다. 많은 죽음이 신고조차 되지 않았다. 누가 여성들을 죽였는지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집단 미제 사건'이다.

2004년 멕시코 국경도시 후아레스의 골목길 전봇대에 '시체나 쓰레기를 버리면 벌금을 물리겠다'는 내용의 경고문이 나붙었다. 연합뉴스

'여성 살해 수도' 악명 떨친 후아레스

후아레스에 사는 16세 여학생 팔로마는 고양이를 좋아했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어머니 노르마 레데즈마와 함께 비행기 부품 공장에서 일했다. 영어를 공부해 관광 관련 일자리를 구하거나 통역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2002년 3월 어느 날 컴퓨터 강의를 듣기 위해 집을 나서기 전까진 말이다.

팔로마는 살해됐다. 그러나 정부는 무관심했다. 레데즈마가 실종 신고를 했을 때 경찰의 반응은 "남자친구와 어디서 재미를 보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레데즈마는 투사가 됐다. 당시 초등 교육밖에 받지 못했던 그는 2016년 법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시민단체 '우리 딸들을 위한 정의'를 설립해 정부의 무관심과 싸우고 여성에 대한 폭력을 종식하기 위해 앞장 서고 있다.

레데즈마는 여전히 수시로 가슴을 친다.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누가 팔로마를 죽인 건가. 팔로마는 어떻게 죽었는가. 우리는 아직도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2016년 멕시코 후아레스 공항 근처에서 실종된 여성의 친척들이 정부에 항의하고 있다. AFP 게티이미지뱅크

'후아레스의 팔로마'는 한둘이 아니었다. 피해자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12~22세의 여성, 공장 노동자이거나 학생, 도시 외곽에서 돈을 벌러 온 가난한 가정 출신.

후아레스에서 리오그란데강을 건너면 미국 텍사스주 엘파소다.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 이후 후아레스에는 한때 4,500개가 넘는 마킬라도라(조립가공형 공장)가 번창했다. 공장을 지탱하는 건 나이 어린 저임금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2017년까지도 하루 4달러 50센트에 불과한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일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취약했다. 실종됐다가 며칠 혹은 몇 달 후 공터나 사막에 버려진 채 주검으로 발견되는 여성이 많았다. 시신엔 성폭력, 학대, 고문, 사후 훼손 흔적이 남아 있었다. 시신이 쌓여 가도 가해자들은 잡히지 않았다.

'하찮은 죽음들'은 관심을 끌지 못했다. 여성이 사라지고 살해되는 일은 흔한 일로 치부됐다. 치와와주는 여성들에게 범죄 유발의 책임을 돌렸다. △밤에 외출하지 말고 △낯선 사람과 이야기하지 말고 △도발적 옷차림을 피하라고 권고했다. "성적 공격을 받으면 토하는 척해라. 그러면 가해자가 도망갈지 모른다"고 일러주기도 했다. 희생자를 두고 "이중생활을 한 성매매 여성이었다"고 모욕하는 등 2차 가해도 서슴지 않았다.

2020년 1월 멕시코 후아레스에서 페미사이드로 숨진 한 여성의 사진을 든 채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로이터 게티이미지뱅크

누가 후아레스 여성들을 죽였나… 페미사이드!

여성들은 개별 여성들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했다. 구조적인 '페미사이드(Female과 Homicide를 합한 말·여성 살해)'라고 규정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범죄 표적이 되어 살해됐다는 뜻이다. 지금도 멕시코에선 하루 평균 10명의 여성이 여성을 겨냥한 범죄로 목숨을 잃는다.

여성들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조장하는 여성혐오 문화, 범죄를 처단하지 않는 정부, 여성을 취약하게 하는 경제적 불평등에 맞서 싸우고 있다. 미국 뉴멕시코 주립대에서 페미사이드를 연구하는 신시아 베자라노 교수는 "'누가 후아레스 여성들을 죽였는지'를 묻는다면, 질문부터 틀렸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했다.

"묻고 싶습니다. 여자인 게 죄인가요?" 2008년 후아레스에서 막내딸 아드리아나(당시 15세)를 잃은 에르네스티나 엔리케스는 울분을 토했다. 방과 후 시내 중심가에서 버스를 탄 이후 아드리아나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시내 모든 동네와 버스를 샅샅이 뒤졌지만 실마리 하나 찾지 못했다.

엔리케스가 딸의 죽음을 안 건 2011년 11월 멕시코 정부 법의학사무소 페이스북을 통해서였다. 아드리아나의 시신은 2009년 집에서 1시간 떨어진 지역에서 발견됐지만, 당시 아무도 그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 엔리케스는 "경찰도 믿을 수 없다.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권위도, 정의도, 존중도, 아무것도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여성혐오에 맞서 싸우는 운동가가 됐다.

저니나 레예스도 마찬가지다. 딸 조슬린 칼데론(당시 13세)은 2012년 12월 친구 집에 가던 중 실종됐다. 레예스는 "우리는 거리로 나가 희생자들의 이름을 외치고 싸우고 있다. 딸들을 찾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후… "멕시코 전체가 후아레스가 됐다"

2020년 멕시코 여성들은 정부의 무능을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페미사이드 철폐를 외쳤던 잉그리드 에스카미야(25)가 동거남에 의해 살해되고 연달아 실종된 7세 소녀 파티마 알드리게트가 검은색 쓰레기봉투에 담긴 채 시신으로 발견되면서다. "여성 살해 사례는 언론에서 조작한 게 많다"는 '남성'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의 발언은 거센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여성들의 끈질긴 싸움 덕분에 멕시코는 2012년부터 '성별을 이유로 여성을 살해한 범죄'를 형법상 살인과 달리 '페미사이드'로 따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성폭력 흔적이 있거나 △신체·시신을 훼손했거나 △시신을 공공장소에 전시하는 등 7가지 항목 중 하나에라도 해당하면 페미사이드로 보고 최대 60년 징역형에 처한다.

실종됐다 시신으로 돌아온 7세 파티마 알드리게트. AP 연합뉴스

그럼에도 페미사이드의 상당수는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다. 페미사이드의 심각성을 간과한 정부가 방치한 구조적 미제 사건이다. 전문가들은 "젠더 폭력은 국가 통계에 '과소 보고'되고 법 체계상 처벌이 '과소 집행'된다"고 꼬집었다. 실제 페미사이드 용의자 검거율과 기소율 모두 저조하다.

이는 잠재적 페미사이드 가해자에게 "여성을 살해해도 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를 보낸다. 우드로윌슨센터에서 젠더 폭력 프로젝트를 이끄는 베아트리즈 가르시아 나이스는 "멕시코에선 95%의 페미사이드가 처벌받지 않는다"며 "여전히 페미사이드 범죄가 빈번한 이유"라고 했다.

멕시코 여성들은 계속 싸우고 있다. '우리 딸들을 위한 정의'를 이끄는 레데즈마는 "대중이 페미사이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그것이 멕시코 정부가 책임감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수 있다"고 했다.

2010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멕시코 후아레스에 세워진 분홍색 십자가. AFP 게티이미지뱅크

회색빛 도시 후아레스 곳곳에는 분홍색 십자가가 있다. 여성 살해에 맞서는 단체 '니 우나 마스'가 2002년 후아레스와 엘파소를 잇는 다리에 처음 세운 분홍색 십자가는 페미사이드 희생자의 상징이다. 멕시코 여성들은 시신이 발견된 장소에 꽃으로 장식하거나 희생자 이름을 새긴 분홍색 십자가를 세운다. 차별과 무관심 때문에 콜드케이스로 남은 수많은 페미사이드에 대한 저항과 연대의 표식이다.

두 아이의 엄마인 힐다 마리아 오르테가는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게 두려워 우리 자신을 집에 가둘 수 없다"며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은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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