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꺾이지 않는 마음, 꺾이지 않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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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마음 꺾이더라도 사회가 다시 일으켜주는 것
지난해 최고 유행어로 꼽히는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리그오브레전드 게임 세계대회에서 이변을 일으킨 프로게이머 김혁규와 극적으로 카타르월드컵 16강에 진출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통해 국민들 뇌리에 박혔다. ‘꺾이지 않는’이 정확하게는 김혁규가 한 말이 아니라 인터뷰했던 기자가 취지를 살리면서 창작한 제목이고, 축구대표팀 역시 직접 쓴 게 아니라 관중이 던져준 태극기에 이미 쓰여있었다는 사실은 신화를 살짝 퇴색시키지만, 극적인 감동을 배가했던 한마디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라는 요기 베라(전설적인 미 프로야구 뉴욕 양키스 포수)의 묵은 스포츠 명언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영화 ‘다크워터스(Dark Waters)’는 미 신시내티 한 법무법인에서 일하던 평범한 변호사 롭 빌럿이 거대 화학회사 듀폰을 상대로 싸운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롭은 듀폰이 버린 폐수 때문에 웨스트버지니아 작은 마을 주민들과 가축, 과실이 모두 병들고 망가지자 이들을 위해 손해배상 소송을 이끈다. 정의감에 한껏 불탔지만 그것도 잠시. 금방 결과가 나올 줄 알았던 소송은 지루한 공방전을 거듭하면서 20년을 끌었다. 롭이 33세이던 1998년 시작해 52세가 될 때까지 이어졌다. 그사이 소송을 함께한 주민 절반이 지쳐 포기하거나 세상을 떠났다. 긴 세월 외로운 투쟁을 하는 동안 롭은 듀폰을 건드리지 말라는 주위 압력, 이제 그만하자는 부인의 애원, 도와준다더니 뭐냐는 주민들 원성에 시달려야 했다. 영혼까지 너덜너덜해졌을 무렵, 다시 열린 재판에서 재판장은 변호사 출석을 확인하면서 놀란다. “아직도 있네요?(still here?)” 20년이 흘렀는데 여전히 맡고 있냐는 것이다. 롭은 담담히 답한다, “아직 있습니다(still here).” 그리고 재판은 롭과 주민들이 듀폰에게서 7억달러 가까운 손해배상금을 받아내며 승리로 끝난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자. 롭처럼 20년 동안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투쟁을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저 꺾이지 않는 마음만 있다면 가망 없어 보이는 대결에서 승리하고 정의를 찾아올 수 있을까. 그 꺾이지 않는 마음이 중요한 건 맞겠지만, 마음만으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이 있다. 현실에선 오히려 그런 싸움이 더 많다.
오래전 어느 잡지에서 남편이 갑작스레 실직하고 병에 걸리자 가족 생계를 위해 온갖 잡일을 닥치는 대로 하면서 악전고투하던 아내가 했던 고백을 읽은 기억이 있다. 그녀는 가장 절망스러웠던 순간을 묻자 “더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였다고 했다. 아니 지금도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는데 뭘 어떻게 더 노력하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이었다. 충고한 사람이야 진심으로 걱정해서 한 말이었겠지만 그녀는 이 세상에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현실에선 노력만으로 감당할 수 없을 때가 자주 있다. 그런 무거운 상황을 놓고 꺾이지 않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는 훈계는 자칫 마음에 상처가 될 수 있다. 전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박지성이 “안 꺾이고 싶어도 꺾일 때가 있다”고 말한 것도 그런 맥락을 알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개인의 ‘마음’만이 아니다. 설사 꺾이더라도 그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공동체가 지지하고 지원하는 시스템(체계)을 구축하는 작업이다. 꺾이지 않는 ‘사회’를 다 같이 만드는 과정인 셈이다. 마음이 꺾이더라도 산산조각 나지 않도록 누군가 붙들어 줄 수 있다면, 실패의 경험이 좌절과 고통 속에서 영원히 가라앉지 않도록 도와주는 환경이 만들어진다면, 일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꺾이지 않는 마음은 자연스레 자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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