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받은 것처럼… 피아노로 사람들 위로하고파”
경기도 포천에서 장애인 시설을 운영하는 박정순(52)씨는 지난 2002년 태어난 지 한 달밖에 안 된 여자아이를 입양했다. 자신의 장애인 시설에 맡겨진 아이였다. 처음에는 잠시 맡아두기만 하려고 했다. 하지만 볼수록 이 아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어 맡은 지 일주일 만에 입양을 결심했다. 교통사고로 지체장애 1급이었던 남편과 2001년 결혼한 박씨는 아이를 포기하고 있었는데, 결혼 1년 만에 생각도 못했던 딸이 생긴 것이다. 입양하고 나서 며칠 후 보건소로 신생아 예방접종을 하러 갔다가 아이 이름을 기재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예은’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유예은(21)씨는 실제 태어난 날 대신 입양 날을 ‘생일’로 챙기고 있다.
유씨는 안구 없이 태어난 시각장애인이다. 한 번도 세상을 본 적 없던 그가 세 살 되던 2005년이었다. 박씨를 따라 매주 가던 교회에서 피아노를 가지고 놀다 당시 박씨 부부가 자주 흥얼거리곤 했던 가수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를 치기 시작했다. 누가 피아노를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그가 건반을 누르며 곡을 연주하자 모두가 기적이라고 했다. 박씨는 “교회 장로가 달려와 ‘예은이가 피아노를 친다’고 말해 깜짝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1996년부터 장애인을 위해 봉사해왔던 박씨는 시각장애를 가진 딸이 맞닥뜨릴 냉정한 현실을 잘 알았다. 박씨는 딸이 피아노를 통해 스스로 살아갈 힘을 얻게 해주고 싶었다. 중고 피아노를 장만해 집에서 매일 1시간씩 딸과 피아노 앞에 앉았다. 박씨는 피아노를 칠 줄 몰랐지만, 딸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박씨는 “시각장애인에게 중요한 건 반복”이라며 “비장애인이 한 번에 할 수 있는 것도 세 번, 네 번은 더 해야 되는 만큼 옆에서 기다려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딸이 피아노 치는 영상을 올리기 시작한 것도 딸의 자립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주기 위해서였다. 유씨가 유명해지면 나중에 연주회를 열 때 사람들이 들으러 와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결국 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2007년 방송 프로그램에 피아노 신동으로 출연했다. 이후 유씨는 여러 TV 프로그램을 통해 많이 알려졌고, 2015년에는 유씨 이야기를 소재로 ‘기적의 피아노’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됐다.
유씨는 장애인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를 다녔다. 비장애인과 경쟁하면서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길 바랐던 어머니의 마음 때문이다. 유씨도 일반학교를 갔던 게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그는 “학창 시절에 친구들과 유행이나 학교 얘기를 많이 하면서 비장애인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유씨는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 지난해 한세대 피아노과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다. 교수가 ‘먹구름이 몰려오는 장면을 상상해봐’라며 악보에 담긴 감정을 설명했지만 먹구름을 본 적이 없는 그였다. 도움을 준 것은 어머니였다. ‘매콤한 떡볶이를 먹었던 기억’, ‘바람이 귀를 스치는 소리’같이 유씨가 직접 경험하고 느꼈던 것을 떠올려보라고 했다.
피아노를 치기 위해 이렇게 표현부터 하나하나 배워야 하지만, 그럼에도 피아노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의 도움 덕분이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서 아이의 재능 교육을 지원하는 ‘아이 리더’ 프로그램을 통해 2011년부터 지금까지 레슨비 등을 지원받고 있다. 방정환장학재단과 종교단체에서도 그에게 도움을 줬다.
올해 유씨는 29분짜리 ‘쇼팽 피아노 소나타 3번’을 연주하겠다는 또 하나의 목표를 세웠다. 유씨가 곡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곡을 통째로 외워야만 한다. 이제껏 가장 길게 연주한 곡이 19분 정도 분량이었는데, 이보다 10분이나 긴 곡에 도전하는 것이다. 모녀는 “피아노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지금껏 받은 것을 돌려주자고 서로 약속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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