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적 초심[이기진 교수의 만만한 과학]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2023. 1. 20.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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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 개념 중 '엔트로피'라는 개념이 있다.

예를 들어 향수 뚜껑을 열면 병 속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던 액체 향수가 공기 중으로 무질서하게 퍼져 나간다.

기체가 된 향수가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은 더 넓어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무질서도는 증가한다.

이런 '시간의 화살' 개념을 이야기한 물리학자가 바로 스티븐 호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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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물리학 개념 중 ‘엔트로피’라는 개념이 있다. 무질서도(無秩序度)를 말한다. 예를 들어 향수 뚜껑을 열면 병 속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던 액체 향수가 공기 중으로 무질서하게 퍼져 나간다. 기체가 된 향수가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은 더 넓어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무질서도는 증가한다.

이런 엔트로피 개념을 이용해 시간의 방향을 정의할 수 있다. 깨진 유리컵은 결코 깨지기 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흘러야 한다. 마치 활시위를 떠난 시간의 화살처럼. 이런 ‘시간의 화살’ 개념을 이야기한 물리학자가 바로 스티븐 호킹이다. 그는 이런 열역학적 시간 화살 외에, ‘심리적 시간 화살’이 존재한다고 했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시간의 감각이 화살처럼 앞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는 화살이 지나간 궤적처럼 남는다.

시간의 화살과 같이 한 해가 후딱 지나갔다. 1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마스크를 쓰고 지뢰를 피하듯 하루하루를 보낸 것 같다. 끝내 코로나에 걸려 고생하긴 했지만. 연구실은 점점 무질서해졌다. 학기를 마치고 물건으로 가득 찬 어지러운 연구실을 정리했다. 그동안 읽은 책들, 강의 노트, 읽은 논문, 학생들이 치른 시험지…. 기한이 지난 컵라면과 햇반도 있었다. 종일 버리고 치웠는데 퇴근할 때 뒤돌아보니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리만 이동했을 뿐. 면담하러 온 학생들이 등에 멘 가방으로 뭔가를 건드려 깨트리는 일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더 버려야 하는데…. 올해 면담하러 올 신입생들을 위해서라도 더 치워야 한다고 다짐해본다.

30년 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때 20kg 가방을 하나 들고 갔다. 지도교수 선물, 당장 입을 옷, 참고 논문, 오래되고 때 묻은 베개, 그리고 꿈 해몽 책 한 권. 그때는 꿈을 자주 꾸곤 했는데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궁금하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책을 펴서 꿈을 확인하곤 했다.

당시 논문을 투고하면 결과가 도착할 즈음 어김없이 꿈을 꾸곤 했다. 신기하게도 해몽이 좋으면 논문이 통과되거나 좋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해몽이 좋지 않으면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한 편의 논문이 삶의 전부처럼 여겨지던 단순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복잡해졌다.

요즘엔 이상하게 꿈도 잘 꾸지 않는다. 걱정거리가 있으면 새벽까지 잠을 못 자고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든다. 지금까지 공부했던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해도 해결점을 찾지 못할 때가 많다. 물리학 공부를 시작할 때만 해도 얇고 짧은 지식으로 무모하게 시작했던 일이 예상치 못한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는데, 지금은 더 많은 지식과 더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는데도 더 더디고 조심스럽다.

올해의 목표는 20kg 가방 속에 단출하게 꿈 해몽 책과 베개를 집어넣고 시작했을 때처럼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초심이라면 초심. 엔트로피 개념으로 보면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노력이라도 해보는 게 인간의 숙명이 아닐까?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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