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국의 우리문화 들배지기] 히에로글리프에서 정음(正音)까지
이집트가 왔다. ‘미라 - 부활을 위한 여정’이 서예박물관에서 성황이다. 신전에 새겨진 그림문자를 보면 이집트인들은 죽기 위해 산 것 같다. 전시장의 미라는 2000여년의 역사시대를 지나고도 다시 3000여년에 걸친 문명발상지의 사람이 아닐 정도로 생생하다.
파라오가 미라로 보존된 이유는 ‘바(ba, 죽은 자의 영혼)’가 다시 육체로 돌아와 내세에서 영원한 삶을 산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죽음이야말로 새 생의 관문이다. 네스나크트의 <사자의 서(The Book of the Dead)>를 보자. 명부세계를 다스리는 신인 오시리스의 심판장에서 깃털보다 가벼운 심장무게로 그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미라를 아멘신이 보호한다’는 파피루스에 각필된 주문(呪文), 즉 신성문자인 히에로글리프의 영성의 힘으로 사후세계에서 부활한다. 살기 위해 죽을힘으로 아등바등하는 현대인들과는 반대의 생사관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이들이다.
미라는 고사하고 주검을 불태우고 마는 오늘날 우리의 생사관과 너무 다르다.
‘히에로글리프(Hieroglyph)’는 입(R) 팔(E) 다리(B)는 물론 독수리(A) 뱀(V) 사자(L)나 갈대(I) 물결(N), 의자(P) 빵(T) 바구니(K) 등 자연물이나 생활용품을 상형한 것인데, 오늘날 문자영상시대 일종의 이모티콘의 전신을 여기서 본다.
특히 표음과 표의를 공유한 인류 최초의 자음표기문자로 예컨대 ‘KLEOPATRA’라는 말이 <그림>과 같이 카르투슈라고 부르는 타원 안에 선형적으로 표기되는 경우와 같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상형의 성격이다. 사물의 형태를 추상화한 상형은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의 언어와 예술 활동의 시작이자 끝이다. 천전리 반구대 양전동과 같이 추상과 구상을 다 가진 암각화는 소리와 사물에 대응하는 그림단계라면 히에로글리프 쐐기문자 갑골문은 말과 그림이 상응하는 그림문자다. 그다음 자형이 극도로 추상화된 한자와 알파벳은 표의와 표음문자다.
이런 맥락에서 훈민정음은 상형 중의 상형, 추상 중의 추상이다. 더 이상 더하고 뺄 수 없는 조형구조인데 ㄱㄴㅁㅅㅇ과 같이 발음기관과 · ㅡㅣ와 같이 천지인을 상형해낸 결과다. 이와 동시에 자음과 모음의 음소단위로 분해된 소리를 짝하여 음절로 시각화해내는 메커니즘을 가진 최고의 문자단계가 정음이다.
정음은 한국말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말과 소리까지 다 눈에 보이게 한다. 예컨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형태를 추상화해낸 ‘ㄱ’은 거칠어지면 ‘ㅋ’, 된소리가 되면 ‘ㄲ’이 된다. ‘ㄱ’에 한 획을 더 하면 ‘ㅋ’이 되는 이런 가획(加劃)으로 무한대의 소리를 그려내는 원리는 알파벳 ‘g’와 ‘c’ ‘k’에는 없다.
그래서 정음은 표음문자에 방점이 찍히지만 상형문자이자 표의문자의 성질을 다 가지고 있고, 소리의 성질까지 표현해내는 자질(資質)문자의 반열에 놓인다.
히에로글리프나 알파벳은 소리와 문자조형의 구조가 따로 노는데 정음은 일정한 질서가 있다. 다 같은 상형원리로 만든 문자이지만 정음과 여타문자는 차원이 다르다.
KLEOPATRA는 그림의 선형적인 나열이지만 정음에서 ‘클’이라는 소리는 음소단위로 분해되어 ‘초성ㅋ + 중성ㅡ + 종성ㄹ’의 3층탑으로 건축되면서 시각화된다.
요컨대 자음표기의 시작인 히에로글리프에서 자모를 초·중성으로 건축해낸 정음까지의 문자 변화과정을 보면 인간의 인지세계가 어떻게 진화해왔는지가 잘 드러난다.
그래서 문자로 인류문명을 척도할 때 정음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인지의 궁극에 가 있다. 5000여년 나이의 ‘사자의 서’ 히에로글리프 앞에서 600살 정음이 ‘어린 인류’의 ‘산자의 서’로 다가오고 있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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