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자막에 ‘사흘’을 ‘4일’로 썼다가 다시보기에서 고친 SBS ‘꼬꼬무’

유석재 기자 2023. 1. 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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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해력 저하 사태... 의미체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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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저녁 TV를 보다가 좀 흠칫했습니다. SBS 시사교양 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약칭 꼬꼬무) 61회를 보던 중이었습니다. 상당히 공들여 만드는데다가 최근 들어선 정치적 편향성을 띠는 에피소드도 줄어들어 제가 평소에 즐겨 보는 프로그램입니다. 이번 회차는 1984~1985년의 식품회사 독극물 협박 사건을 다룬 이야기였습니다.

2023년 1월 12일 SBS 시사교양 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61회에서 진행자 장성규가 1984~1985년의 식품회사 독극물 협박 사건을 설명하는 모습. /SBS

진행자 중 한 사람인 장성규가 “편지를 보내고 사흘 뒤, 협박범은 은행에 또 나타났어”라고 말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장성규는 분명 ‘사흘’이라고 발음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던 가수 문빈의 얼굴 아래로 이런 자막이 나왔습니다.

협박편지가 오고 4일 후

2023년 1월 12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진행자 장성규가 '편지를 보내고 사흘 뒤'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이야기를 듣는 가수 문빈의 얼굴 아래로 '협박편지가 오고 4일 후'라는 자막이 나왔다. /SBS 화면 캡처

누군가 지적을 한 모양인지, 현재 웨이브에서 볼 수 있는 VOD에서는 아무런 공지 없이 이렇게 바뀐 상태입니다.

‘협박편지가 오고 3일 후’

같은 장면의 자막이 현재 VOD(다시보기)에선 '4일'에서 '3일'로 바뀌었다. /웨이브 화면 캡처

물론 방송 프로그램에서 자막 오타가 나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오타는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사흘’을 ‘4일’로 잘못 아는 것이 대학생 이하 어린 세대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송국에서 자막 작업을 하는 직원이라면 최소한 대졸 학력의 성인일 테니 말입니다.

이렇게 점점 말이 뜻을 잃고 서로 의미가 통하지 않게 된 세태에 대해 저는 얼마 전 신문 지면에 칼럼을 썼습니다(https://www.chosun.com/opinion/dongseonambuk/2023/01/09/WLSHDW5H6RETBLATE26FEI3KWY/). 요지는, 젊은 세대의 문해력과 어휘력이 상상을 벗어날 정도로 떨어지는 것은 결국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기성세대의 잘못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지구력(持久力)’을 ‘지구의 힘’ 쯤으로 이해하고, ‘금일(今日)’을 ‘금요일’로 오해한 뒤 왜 오해할 수 있는 말을 썼느냐고 항변하는 일에 대해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이제는 성인들 사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대통령은 더 이상 문고리 실세들의 뒤에 숨어서 호가호위하지 말라”고 했던 사람은 분명 방송사 아나운서 출신의 40대 국회의원이었습니다. ‘호가호위(狐假虎威)’가 그런 뜻이었던가요?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린다는 말이니 만약 ‘문고리 실세들이 대통령을 내세워 호가호위하지 말라’고 했다면 그나마 문장의 뜻은 통했을 것입니다.

2022년 7월 25일 국회에서 대정부질문을 하고 있는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 /국회방송

이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데 더 큰 심각성이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 4대강 사업 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가 발표한 성명서 중에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한국 사회의 자유민주주의는 불편부당한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서 있다.”

……?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릴까요? 불편부당(不偏不黨)이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한편과 무리짓지 않는다’는 긍정적인 뜻인데, 왜 ‘자유민주주의가 위태롭게 서 있는 벼랑’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한 걸까요?

한 지자체 홈페이지에 이런 문구가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민원 처리 과정의 불편부당한 대우 및 불친절한 사례 신고 접수.’

아마도 ‘불편부당’을 ‘불편(不便)’하고 ‘부당(不當)’하다는 뜻 정도로 인식했던 모양입니다. 이것도 지적이 들어왔는지, 얼마 뒤 이 홈페이지는 해당 문구를 이렇게 수정했습니다.

‘민원 처리 과정의 불편/부당한 대우 및 불친절한 사례 신고 접수.’

아이고 참…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홈페이지에 ‘민원처리불편부당신고’라는 신고난을 운영하는 지자체가 있습니다. 민원처리가 불편부당하다면 칭찬을 해 줘야 할 일일 것인데 도대체 왜 신고를 한다는 건지 쉽게 이해가 가지는 않습니다.

전남 한 지자체의 홈페이지에 실린 신고센터 목록. '민원처리불편부당신고센터'란 항목이 보인다.

‘폐해(弊害)’라는 말에 대해 표준국어대사전은 ‘폐단으로 생기는 해’라고 말합니다. 사실 어려운 말도 아니죠. 그러나 포털사이트에서 한번 ‘폐혜’라는 말을 검색해 보십시오. 온갖 뉴스 기사와 백과사전은 물론 ‘방송규제와 편파보도에 의한 폐혜’라는 학술논문 제목도 검색됩니다.

‘폐혜’가 뭘까요? 폐단과 혜택을 함께 이르는 폐해(弊惠) 정도 되는 말일까요? 그러나 ‘폐혜’라는 말은 없습니다.

이런 사례를 들자면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역할(役割)’은 ‘자기가 마땅히 하여야 할 맡은 바 직책이나 임무’라는 뜻입니다. 이 또한 ‘역활(力活?)’이라고 잘못 쓴 사례는 허다합니다. 한 방송 뉴스에선 리포트 중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습니다. “CCTV에 촬영된 인물은 용의자와 인상착의는 물론 옷차림까지 같다고 합니다.” 인상착의(人相着衣)의 ‘착의(着衣)’가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저런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사불란(一絲不亂)’을 ‘일사분란’으로 잘못 쓴 사례는 지금도 TV프로그램 자막에서 숱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설욕(雪辱)’의 ‘설(雪)’자가 무슨 뜻인지 모른 채 ‘설욕을 씻다’고 표현하거나, ‘화룡점정(畵龍點睛)’을 ‘화룡정점’이라 쓰는 걸 보면 좀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한 언론사 뉴스 기사에서 '일사불란'을 '일사분란'으로 잘못 쓴 사례.

‘일취월장(日就月將)’을 ‘일치얼짱’이라 쓰거나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을 ‘동해 번쩍 서해 번쩍’, ‘연예인(演藝人)’을 ‘연애인’, ‘고리타분’을 ‘골이 따분’, ‘꽃샘추위’를 ‘곱셈추위’, ‘수포(水泡)로 돌아갔다’를 ‘숲으로 돌아갔다’로 쓰는 데 이르면 자유분방한 창의력이 돋보인다는 생각마저 아주 잠시 들 정도입니다.

인터넷에선 저런 말들을 장난으로 쓰는 경우와 진짜인 줄 알고 쓰는 경우가 모두 있기 때문에 주의를 요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행복해요’를 ‘햄볶아요’, ‘그 자체(自體)’를 ‘그 잡채’로 쓰는 경우는 대부분 의도적인 언어유희입니다.

많은 분들은 ‘한자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은 탓에 말의 속뜻을 모르는 데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지적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저는 2014년 한 해 동안 25회에 걸쳐 ‘한자 문맹(文盲) 벗어나자’는 기획기사를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 때는 실제로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넣는 것이 결정돼 실행 일보직전까지 갔지만 한국사 국정 교과서 정책에 밀려 보류됐고, 문재인 정부 들어 없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기획기사를 쓰던 중 많은 분들이 우려하신 것은 ‘어휘의 뜻을 제대로 모르고 사용하는 일이 많아질수록 의미가 혼동되는 일이 발생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어느 과목을 진료하시던 분이냐” “일본에 야스쿠니 신사가 있다면 야스쿠니 숙녀도 있느냐”는 얘기가 우스개만은 아니었습니다. 한 지방대의 영자신문은 자기들 주간(主幹)교수를 ‘weekly professor’라 표기하기도 했습니다. 그 영자신문이 일주일에 한 번 발행됐던 모양입니다.

한 일본인이 이런 경고성 충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불을 놓는 방화(放火)와 불을 막는 방화(防火)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한국인들은 장차 어찌하려 하는가?”

비슷한 말을 언어 분야 전문가가 아닌 대학병원 원로 교수가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젊은 의사들이 헛갈리고 있습니다. 산모가 진통(陣痛)을 겪고 있는데 진통(鎭痛) 주사를 놓아야 한다는 게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요.”

한번은 기사에 “요즘 학생들은 ‘조인식(調印式)’의 ‘조인’을 영어 ‘조인(join)’으로 아는 경우도 있다”고 했더니 후배 기자 한 명이 이렇게 털어놓은 적도 있었습니다. “선배… 저도 지금껏 join인 줄 알았어요. 감사합니다.”

당시 국어학자인 이병선 부산대 명예교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글로만 표기된 한자어는 동음이의어 구별이 불가능하다. 기능(技能)은 기술상의 재능이고 기능(機能)은 하는 구실이나 작용을 말한다. 출가(出家)는 집을 떠나는 것이고 출가(出嫁)는 시집을 가는 것이다. 한자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사고력과 탐구력을 약화시키고, 어휘 체계의 붕괴로 사고(思考) 체계마저 무너뜨릴 수 있다.”

'내구재 대출'의 '내구재(耐久財)'가 '내 구제(救濟)'로 둔갑한 모습.

한자를 모르는, 아니 한자가 있는 줄도 모르는 현재의 언어 교육이 사고 체계를 붕괴시킬 수 있다는 징후가 지금은 곳곳에서 보이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내구재대출(耐久財貸出)’이란 것이 있습니다. 내구재란 ‘오랫동안 쓸 수 있는 재화’를 말합니다. 휴대폰이나 정수기 같은 물건을 산 뒤 이를 담보로 돈을 빌리거나 해당 현물을 되파는 수법으로 대출이 이뤄지는 것이죠. 그런데 이 대출의 명칭이 최근 기묘하게도 ‘내 구제 대출’로 은근슬쩍 바뀌었습니다.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을 상대로 이뤄지는 불법 사금융이, 한자를 쓰지 않음으로써 벌어진 의미상의 혼란을 타고 마치 ‘나 자신을 구제해주는 아주 좋은 대출’인 것처럼 둔갑한 셈이죠.

이 같은 의미의 혼란과 사고 체계의 붕괴는 이제 시작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더 큰 혼란을 예고하는 징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고 한탄하기 전에, 과연 자식과 손주와 제자에게 말의 올바른 의미를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고 평소에 얼마나 노력했는지 돌이켜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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