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칼럼] 납치당한 ‘진보’
진보와 거리 먼 세력이 자기 것으로 만들고
그 간판 뒤에 숨어 낡은 수구적 실체를 숨기고 있다
국가정보원이 제주 간첩단을 수사하면서 신청한 영장엔 북한이 ‘진보’ 운운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북이 간첩단에 통신문을 보내 “(6·1 지방선거에서) 진보 운동 단체들을 발동해 진보 진영 후보 지지 운동을 벌이라”는 등의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북이 ‘진보 단체’로 지목한 곳은 민노총과 산하 노조들, ‘진보 후보’로 예시한 것은 진보당이었다. 북한은 지구상에서 가장 후진적이고 봉건적인 수구 집단이다. 진보와 정반대 대척점에 있는 북한까지 자기편을 진보로 지칭하며 이 말을 제 것인 양 갖다 쓰고 있다. 북에 납치당한 ‘진보’가 기가 막힐 지경이다.
진영 전쟁이 치열한 한반도에서 ‘진보’만큼 오용(誤用)되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북한이 지목한 민노총·진보당을 비롯해 온갖 단체와 사회 세력, 수많은 정치인과 운동가가 진보의 정체성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진보는 진짜가 아닌 경우가 많다. 세상을 더 낫게 만든다는 뜻의 진보가 원래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엉뚱한 세력에 포획되어 잘못 소비되고 있다. 겉으로만 진보이고 실체는 수구인 무자격 진보들이 곳곳에 넘쳐나고 있다.
민노총은 진보 단체인가. 공장을 점거하고, 물류를 마비시키고, 공사를 멈춰 세우는 불법·폭력의 대명사가 진보일 리 없다. 민주노총은 심지어 민주적이지도 않다. 조합원들이 탈퇴를 원하는데도 못 하게 막는 조폭 같은 조직에 ‘민주’는 어울리지 않는다. 민노총은 자본가를 적으로 보는 80년대 운동권식 세계관에 머물러 있는 집단이다. 일자리의 개념 자체가 달라졌는데 21세기 노동관을 따라잡지 못하는 낡은 조직이 어떻게 진보일 수 있나.
진보당은 진보 정당인가. 진보당은 2013년 이석기 내란 음모 사건으로 해산된 통합진보당의 후신이다. 주사파 NL 계열이 주도하는 이 당은 주한 미군 철수, 한미 동맹 파기 같은 반미 노선을 당론으로 정하고 있다. 외세 배격의 자립 경제와 재벌 해체, 30억원 이상 상속 재산 몰수 등을 주장하며 역사에서 몰락한 사회주의 국가 주도 경제를 표방하기도 한다. 이런 반시장·친북 정당이 어떻게 진보인가.
진보의 핵심은 미래지향성이다. 변화를 통해 사회를 개선하고 역사를 진전시키는 발전의 이데올로기다. 한반도에서 진보를 표방하는 수많은 정치·사회 세력 중 이 기준에 맞는 곳은 드물다. 북한 인권과 핵 위협에 침묵하는 정당, 중국의 고압 외교에 굴종하는 정치인, 4차 산업혁명 앞에서 계급 투쟁을 고집하는 단체가 무슨 진보인가.
‘진보 집권 플랜’을 주창했던 조국 전 법무장관은 자타가 공인하는 진보의 스타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자녀 스펙을 조작하며 남의 기회를 새치기 하는 위선자였다. ‘진보 20년 집권론’을 외쳤던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는 버럭 호통으로 유명한 꼰대 중의 꼰대였다. 이들이 진보주의자인가. 해방 후 80년 다 된 지금까지 ‘토착 왜구’ ‘죽창가’ 운운하는 정치인이 어떻게 진보일 수 있나.
나는 혁신적 기업이야말로 우리 사회 최고의 진보 집단이라 생각한다. 기업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신기술의 힘으로 가치를 창출하고 대중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일부 부도덕한 기업도 있지만 대다수 기업은 변화에 가장 앞서 반응하며 세상을 발전시키는 주력 엔진으로 역할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한국에선 기업을 못살게 구는 반(反)기업이 진보로 둔갑했다. 기업에 족쇄 채우며 혁신을 막으려는 사람들이 진보인 양 행세하고 있다.
진보와 거리가 먼 세력이 진보를 스토킹하는 것은 이 말에 담긴 우월적 의미가 탐나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을 좋게 만드는 진보의 이념이라니, 얼마나 멋진 말인가. 사람들 가슴을 뛰게 하는 이 용어를 좌파 세력이 가져다 제 것으로 만들었다. 진보를 간판으로 내걸고 그 뒤에 숨어 1987년 민주화 이후 화석화된 수구적 실체를 감추고 있다. 세상을 속이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언론·학계를 비롯한 우리 사회가 별생각 없이 이들의 진보 프레임을 수용하고 있는 점이다. 진보란 말이 이렇게 광범위하게 오·남용되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미국이 민주당을, 영국이 노동당을, 일본이 사회당을 진보주의(progressivism)라고 하진 않는다. 특정 정파와 지지 세력을 뭉뚱그려 진보 진영이라 하는 일은 더더욱 없다. 유독 한국에서만 진보가 오용되고 잘못된 진보의 프레임이 폭주하고 있다.
독재 시절, 우리 사회가 민주화 세력을 진보로 칭한 것은 ‘빨갱이’로 낙인찍히지 않게 보호하려는 배려였을 것이다. 이제 색깔론의 시대는 끝났고 좌파를 좌파라고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자칭 진보’들이 눙치는 논리에 넘어가지 말고 ‘좌파 진영’ ‘친북 단체’ ‘반(反)시장주의자’ ‘큰 정부론자’처럼 정확한 실체를 반영하는 명칭으로 부르는 게 옳다. 납치당한 진보를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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