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베일 벗는 ‘푸틴의 그림자’ 와그너 그룹

선명수 기자 2023. 1. 19. 22:2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고기처럼 총알받이 됐다”
망명 신청한 용병이 증언
총 5만명 중 4만명이 죄수
지난 13일(현지시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의 한 건물에 그려진 벽화. ‘와그너 그룹 - 러시아 기사들’이라는 문구가 쓰였다. AP연합뉴스

“죄수들은 마치 고기처럼 대포의 총알받이가 됐다. 나는 죄수 그룹을 이끌었고, 우리 소대 30명 중 3명만 살아남았다.”

우크라이나 동부 격전지 바흐무트에서 탈출해 노르웨이에 망명을 신청한 와그너 그룹의 용병 안드레이 메드베데프(26)는 지난 17일(현지시간) 전장의 실상을 이렇게 전했다. 그는 전투를 거부한 용병들은 잔인하게 처형당했으며, 그 역시 계약 연장에 응하지 않으면 보복할 것이라는 위협을 받고 전장에서 탈출했다고 가디언에 말했다.

오랫동안 ‘푸틴의 그림자’로 불렸던 와그너 그룹의 실체가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미국 정보당국은 우크라이나전에 투입된 5만여명의 와그너 용병 중 4만여명이 교도소에서 모집한 재소자로 보고 있다. 와그너는 전국의 교도소를 돌며 러시아 사병보다 두 배 이상 많은 24만루블(약 517만원)의 월급, 6개월 복무하면 사면해준다는 대가를 제시했다. 러시아 정부의 개입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약속이다.

와그너는 머릿수를 늘리기 위해 러시아 바깥에서도 공격적인 모집 활동을 벌이고 있다. 알렉산다르 부치치 세르비아 대통령은 17일 자국민을 대상으로 용병을 모집하지 말라고 러시아와 와그너 그룹에 공개 경고했다. 키르기스스탄 언론들도 와그너가 월급 24만루블과 러시아 시민권 획득을 조건으로 걸며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에서 신병을 모집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와그너 그룹은 크렘린의 국빈 만찬 등에 케이터링을 제공해 ‘푸틴의 요리사’로 불리는 기업인 예브게니 프리고진과 체첸전쟁의 군 지휘관 출신인 드미트리 우트킨이 창설한 조직이다.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름반도를 강제로 병합할 때 전쟁에 투입돼 세상에 존재가 드러났다. 이후 시리아와 리비아, 모잠비크, 수단 등의 내전에 개입해 민간인 학살과 성폭력 등 각종 전쟁범죄로도 악명을 떨쳤다.

크름반도 병합 때 실체 노출
크렘린은 그간 관련성 부인
러시아 정규군과 알력설도

크렘린은 그동안 이들과의 관련성을 부인해 왔다. 와그너 같은 민간군사기업(PMC)은 러시아에서 불법이다. 이 때문에 와그너는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유령’ 기업에 가까웠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지난해 ‘30만명 부분 동원령’을 내렸음에도 전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은 푸틴 입장에서 와그너 그룹은 유용한 존재였다. 빠른 전력 보강은 물론 이들은 정식 군인이 아니기 때문에 러시아군의 사상자 집계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이들이 전쟁 범죄를 저질러도 책임을 부인할 수 있다.

그동안 관련성을 부인해오던 프리고진은 지난해 9월 자신이 이 회사를 소유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와그너는 두 달 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고층 빌딩에 공식 본부를 개설했다. 같은 달 크렘린의 주요 선전매체인 RT가 <와그너: 조국과의 계약>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해 홍보하기도 했다.

서방은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전에서 고전하면서 크렘린의 와그너 그룹에 대한 의존도가 커졌고, 프리고진의 러시아 내 영향력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지난달 브리핑에서 “와그너 그룹의 높아진 위상으로 러시아 장교들이 이들의 명령을 받는 경우도 있다”며 “이들이 러시아군 및 다른 세력과 경쟁하는 권력으로 부상했다”고 말했다.

실제 프리고진은 군 경력이 전무하면서도 대놓고 러시아군 지휘부의 무능을 공격하고 있다. 그는 러시아군이 도네츠크 리만을 우크라이나군에 뺏기자 군 최고 사령관의 지휘 실패를 거론하며 “이 XX들을 발가벗겨 기관총을 들려 최전방에 세워야 한다”고 맹비난했다. 바흐무트 인근 솔레다르에서의 전공을 두고서도 연일 와그너와 국방부 간 주도권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미 해군분석센터(CNA)의 러시아 연구책임자 마이클 코프먼은 “프리고진은 이 기회를 통해 러시아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과 발레리 게라시모프 총참모장이 얼마나 무능한지 드러내려고 한다”고 말했다.

결국 크렘린이 진화에 나섰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지난 16일 “(와그너와 군 사이) 갈등은 정보 공간에서만 존재한다”며 “러시아는 영웅을 알고 있다. 양쪽 모두 기억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에서는 누구도 믿지 않는 푸틴이 군부를 견제하기 위해 와그너 그룹을 활용하는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 최근 프리고진과 가까운 관계인 세르게이 수로비킨 우크라이나전 총사령관이 3개월 만에 경질된 것은 거꾸로 급속히 영향력이 커진 와그너 그룹을 견제하려는 차원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