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

한겨레 2023. 1. 19.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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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불평등은 참지만 불공정은 못 참는 , 그리고 ‘ 배고픔 ’ 은 참는데 ‘ 배 아픔 ’ 은 못 참는 태도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 종족적 특성 ’ 이라기보다 한국 사회의 제도적 · 문화적 특징이기 때문이다 . 대한민국은 극소수만 향유할 수 있는 특권을 만들어두고 사람들이 ‘ 패자부활 없는 배틀 로열 ’ 에 뛰어들도록 강제하는 사회다 .
지난해 8월16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열린 폭우 희생자 추모주간 선포 기자회견에서 한 참석자가 ‘불평등이 재난이다’라고 적힌 손팻말 위에 흰 국화 한송이를 올려둔 채 바닥에 앉아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박권일 | 사회비평가·<한국의 능력주의> 저자

오래전 제프리 존스 주한 미상공회의소 명예회장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한국인은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 한국인의 어떤 면모를 절묘하게 포착했다. 그러나 뒤이은 말엔 실소가 터진다. “돈 많은 사람을 시기·질투하는 한국인의 부에 대한 인식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이 왜 그렇게 바뀌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다. 최근 들어 한국인의 재벌과 부유층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한 게 사실이지만 부정적 인식도 여전히 만만찮다.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한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남이 잘되는 걸 못 견디는가? 한국인에게만 존재하는 ‘시기·질투 유전자’ 때문에? 그럴 리 없다. 그럼 한국인이 특별히 평등지향적이어서? 그런 주장도 일부 있지만 현실과 거리가 멀다. 여러 사회조사, 특히 세계가치관조사(WVS) 등 국가 간 비교조사를 보면, 한국인은 어떤 나라들보다 압도적으로 불평등한 소득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온다.

한국인들이 배 아픈 걸 유독 못 참는 이유는 보상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부의 축적과 출세의 과정에 꼼수와 편법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이건 억측이 아니라 숱한 사례로 증명되고 갱신돼온 경험칙이다. 이른바 ‘사회지도층’의 턱없이 높은 군 면제율, 성적 조작 및 ‘스펙 품앗이’ 등 입시비리, 재벌의 불법적 시장교란과 노동착취,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법률가의 집단 부패 관행인 ‘전관예우’(마땅히 ‘전관비리’로 고쳐 불러야 할 것이다) 등 근거는 헤아릴 수 없이 쌓여 있다. 비슷한 경제수준인 나라와 비교해도 한국에서 엘리트 부패 정도는 지나치게 높고 사회적 신뢰는 눈에 띄게 낮다.

그런데 존스씨 말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부분이 있다. “배고픈 건 참아도”다. 이 말은 맥락상 생리적 배고픔이라기보다 ‘내 가난을 스스로 감내해야 한다’는 각오다. 좋게 말해 자립적 태도이겠으나 실은 가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만 찾는 자기계발과 각자도생의 관점에 가깝다. “배고픈 건 참아도”라는 말은 결국,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 대한 체념 혹은 외면이라 할 수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자신의 가난을 대할 때는 다분히 개인적이고 순응적이던 시각이 타인을 향할 때는 제법 구조적이고 비판적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요컨대 내 가난은 내가 못난 탓이거나 어쩔 수 없는 자연재난 같은 일이지만, 남의 성공은 그가 잘나서가 아니라 모종의 반칙이나 제도 실패가 있을 거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는 말을 사회의제의 형태로 정식화한다면 이렇게 서술할 수 있을 게다. “(한국인은) 불평등은 참아도 불공정은 못 참는다.”

불평등은 참지만 불공정은 못 참는, 그리고 ‘배고픔’은 참는데 ‘배 아픔’은 못 참는 태도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종족적 특성’이라기보다 한국 사회의 제도적·문화적 특징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극소수만 향유할 수 있는 특권을 만들어두고 사람들이 ‘패자부활 없는 배틀 로열’에 뛰어들도록 강제하는 사회다. 여기서 특권을 정당화하는 기제가 바로 ‘시험’이다.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입직 및 입학 등에서 시험을 통해 자격을 부여하는 일은 많지만, 명실상부한 의미의 지대(rent)가 주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한국은 대입시험을 포함한 각종 공채시험으로 사회적 지대 소유자를 공식 선발하는 것은 물론, 언론인도 일명 ‘언론고시’라 불리는 시험으로 뽑는다. 심지어 문학가조차 신춘문예 같은 등단 제도를 통해 선발하는 세계 유일의 국가다.

한국 사회는 특권의 불평등에 분노하여 그것을 없애려는 게 아니라, 특권에 접근할 기회의 불평등에만 분노하며 특권은 그대로 유지하려 한다. 바꿔 말하면 ‘결과의 불평등’이 관대하게 용인되는 한편 ‘과정의 불공정’에는 민감한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은 거의 필연적으로 억울한 느낌, 만성적 울분 상태에 빠지기 쉽다. 높은 불평등과 높은 공정성을 동시에 달성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며 거대한 특권은 자체로 반칙과 부정을 양산하기 마련이다.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으며,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댈버그-액턴)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과정의 불공정에 분노하는 태도는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중요한 건 결과의 불평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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