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준의 그래도 진보정치] 녹색 민주주의 혁명을 향하여
[장석준의 그래도 진보정치]
장석준 |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최근 우리말로 번역된 <녹색 민주주의 혁명을 향하여>는 올해 80살이 된 벨기에의 좌파 정치사상가 샹탈 무페가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메시지와도 같은 책이다. 이 책에서 무페가 무엇보다 강조하는 말은 ‘정동’이다. 일상어로 풀면, ‘감정의 힘’쯤 되겠다. 무페는 예로부터 우파는 대중의 정동이 정치에 참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본능적으로 잘 알았지만 좌파는 그렇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세상을 너무 이성의 잣대로만 봤기에 절체절명의 시기에 사람들이 얼마나 이성이 아닌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지 자주 놓쳤다는 것이다.
무페가 보기에 오늘날은 다시 한번 정동이 정치를 결정하는 주된 힘으로 떠오른 시대다. 경제위기, 지정학적 위기, 감염병 위기, 기후위기를 한꺼번에 마주하는 복합위기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미 신자유주의를 거치며 사람들의 삶은 유례없이 불안정해진 상태다. 그런데 복합위기는 이제껏 겪은 불안정한 삶보다 더 고되고 심란한 미래를 몰고 오려 한다. 그러니 2020년대를 살아가는 지구인의 보편적 정서는 불만과 불신, 불안일 수밖에 없다.
이번에도, 마치 1930년대에 그랬듯이 이런 집단적 감정 상태를 더 기민하게 활용한 쪽은 극우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대서양 양안 국가들에서 많은 시민이 정치권에 요구한 것은 안보와 보호였다.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는 삶이었다. 극우 포퓰리스트들은 이주민과 소수자, 좌파만 청소하면 그런 삶을 되찾을 수 있다는 손쉬운 해법을 제시했고, 상당수 유권자가 이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지금까지도 남북미와 유럽 곳곳에서 극우 포퓰리즘이 주요 정치세력으로 군림한다.
무페는 이런 흐름을 누구보다 먼저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 2018년 펴낸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에서 무페는 기존 신자유주의 주류 정치 입장에서 극우 포퓰리즘을 비판해서는 이를 제압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극우 포퓰리즘 물결 이면에는 불안의 시대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기성정치를 향한 대중의 이의제기가 있다. 극우 포퓰리즘은 이를 민첩하게 포착해 기존 주류 정치를 신랄히 공격하며 기선을 잡았다. 이에 맞서려면 좌파 역시 낡은 정치와 선명히 대립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단, 극우파와는 달리 민주주의의 위기를 국수주의나 인종주의가 아니라 더 많은 민주주의를 통해 치유해야 한다. 무페는 이런 전략을 ‘좌파 포퓰리즘’이라 칭했다.
신작 <녹색 민주주의 혁명을 향하여>는 이런 좌파 포퓰리즘론의 연장선에 있다. 다만 전작에서 더 나아가, 안보와 보호를 바라는 대중의 정동에 호응하는 경제사회적 대안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을 좀 더 강조한다. 무페는 이 대안에 ‘녹색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잠정적 이름을 붙인다. 급진적인 그린 뉴딜의 주창자들이 애초에 착안했던 것처럼, 기후위기에 사회 전체의 전환으로 적극 대응하는 가운데 민주주의의 확장, 노동권과 복지의 재건, 자본 통제 등을 꾀해야 한다는 것이다. 복합위기의 시대에 노학자가 후세대에 전하는 뜨거운 유언이다.
무페의 이 전망은 현재 한국사회의 고민과도 겹친다. 우리 주위의 주된 정서 역시 불만과 불안이고, 안전과 보호의 바람이 숱한 요구를 관통한다. 아직 이 요구에 대한 답은 기후위기에 눈 감고, 군비경쟁과 독자 핵무장을 주장하고, 자본에 더 많은 자유를 몰아줘야 한다는 정치뿐이다. 그러나 과감한 탈탄소 전환, 평화의 추구, 완전고용과 보편적 돌봄을 통해 불안에 맞서는 정치 역시 가능하다. 이런 ‘녹색’, ‘평화’, ‘돌봄’의 전망과 만남으로써 안전과 보호의 열망은 전혀 다른 미래를 여는 동력이 될 수 있다.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무페의 ‘녹색 민주주의 혁명’과 상통하는 비전, 즉 녹색, 평화, 돌봄의 비전을 실천하는 정치다. 그것만이 복합위기의 시대에 파시즘과 같은 역사의 더 나쁜 전개 방향에 선제적으로 맞서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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