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자 칼럼]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한겨레 2023. 1. 19.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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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고 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담가에서 자라는 풀은 햇볕을 향해 몸을 일으키느라 굽기도 하고 휘기도 합니다. 산의 나무들도 살기 위해 몸이 휘기도 굽기도 합니다. 사람도 다르지 않겠지요. 행복을 향해 머리를 쳐드는 것입니다.

이경자 | 소설가

조금씩 치매 증세를 보이시는 어머니가 일흔을 훌쩍 넘긴 맏딸을 몹시 걱정하신다고, 함께 사는 동생이 전해줬습니다. 어머니가 회상하며 현재처럼 애달파하는 시점은 제 나이 서너살 때입니다.

전쟁이 나던 해 한겨울, 두번째 피난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해 동짓달에 낳아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핏덩이를 등에 업고 첫째인 저는 눈 내린 길을 걸어가게 했답니다. 그때 사는 형편이 헐벗고 허기져서 피란 갈 생각도 하지 않았대요. 아이 둘을 당신 무릎 양쪽에 앉혀 두팔로 끌어안고 죽는 것이 희망이었는데 이웃들이 그렇게 있으면 안 된다고 다그쳐서 피란길에 올랐다네요. 굶어 죽으나 폭격에 죽으나 죽기는 매일반.

함께 길을 나선 이웃들은 피란민 속에서 놓치고 밤이 되어 빈집에 찾아들었는데 이미 피란민들이 들어차 발 디딜 틈도 없었답니다. 어찌어찌해서 귀퉁이에 끼어 앉아 밤을 새우는데 등에 업혔던 갓난아이는 배가 고파 모기 울음소리로 울었대요. 그래도 앞가슴을 풀어, 몇날을 제대로 먹은 것 없어 속이 비어버린 젖을 물리면 기운 없이 빨다가 잠이 들었답니다. 그래, 곧 죽겠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이건 그때 안 죽은 둘째에 대한 기억이고, 큰애인 저에 대한 기억은 피란민 중에 먹을 것을 싸온 사람들이 아이에게 떡이나 엿 같은 것을 먹이는 모습을 보며 입이 부르트도록 입맛만 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의 100년을 살아낸 어머니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기억은 전쟁과 굶주림입니다. 전쟁과 굶주림의 공포가 현실처럼 남아 있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요즘 제가 그렇습니다.

이달 초에 다낭에 다녀왔습니다. 베트남의 분단선이었던 북위 17도선이 지나가는 곳을 둘러보는 일정이 있었습니다. 분단표지판 앞에서 저는 한동안 굳어 있었습니다.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서러움 같은 감정에 목 놓아 울고 싶었습니다. 아무도 없었다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투정하고 떼를 쓰는 아이처럼 발버둥질 치며 울었을지 모릅니다. 제 고향은 남한과 북한을 적대적으로 갈라놓은 38선이 지나가는 곳. 휴전선이 북쪽 고성까지 올라가긴 했지만, 분단선이 생길 무렵 그곳에 살았던 양양의 어른들에게 38선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베트남의 17도선은 상징기념물이 됐지만 우리나라 38선은 살아 있는 상징물. 아직 휴전 상태입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여러개 이름을 가진 정부가 지나갔습니다. 북한을 주적(主敵)이라고 부르던 시절, 늘 조마조마했습니다. 그저 아이 낳고 열심히 살며 나라가 잘되길 바라는 국민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지만 간첩, 북한의 도발, 미국의 대응 같은 뉴스를 통해 알게 되는 그런 조짐만으로도 생명 존재의 생태계가 공포감으로 뒤흔들리곤 했습니다. 이런 중에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김일성 면담이나 7·4 공동선언 등이 나왔고 천신만고 끝에 탄생한 김대중 대통령은 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도 보였습니다. 한동안 북한을 가리키는 표현에서 주적이란 단어가 사라진 듯했습니다. 국민 모두 열심히 일해서 대한민국은 참 잘 사는 나라가 됐습니다. 전쟁에 대한 공포감도 가라앉거나 잊히기도 했습니다.

저는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고 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담가에서 자라는 풀은 햇볕을 향해 몸을 일으키느라 굽기도 하고 휘기도 합니다. 산의 나무들도 살기 위해 몸이 휘기도 굽기도 합니다. 사람도 다르지 않겠지요. 행복을 향해 머리를 쳐드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오래된 동네 골목길을 걸었습니다. 길바닥에 커다랗게 쓰인 글귀를 보았습니다. ‘여성 안심 귀갓길’ 글귀가 쓰인 길은 좀 큰 골목. 골목 양옆으로는 작은 골목들이 나뭇가지처럼 뻗어 있었습니다. 여성 안심 귀갓길. 속으로 곱씹어보았습니다.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않으려 합니다. 결혼해도 자식 낳는 것에 주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동안 정부 어느 부서에서는 아이를 낳게 하겠다고 엄청난 돈을 퍼부었더라고요.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 정작 돈을 벌어 세금을 내준 국민은 모릅니다.

아이를 낳으면 어머니는 일을 중단해야 합니다. ‘경력단절녀’라는 말도 있습니다. 경력을 지키기 위해선 친정어머니, 시어머니가 가까이 살아야 합니다. 멀리 떨어져 살면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몰라보거나 원망을 간직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린이집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일들. 돈이 먼저인 세상의 진면목들은 예를 들기도 분주해집니다.

놀이터 앞에는 어린 자식의 사회활동을 지키는 어른들이 있습니다. 아이에게 말을 걸거나 먹을 것을 주면 고개 돌리고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요즘은 잘 아는 사람이 건네는 음료도 덜컥 받아 마시면 안 된다고 합니다. 마약 같은 걸 탔을지 몰라서래요.

빈부의 격차는 하늘을 찌를 지경.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엔 아무나 드나들 수 없도록 모든 출입구에 차단문이나 벽이 둘러쳐졌습니다. 공동체가 갈가리 찢기거나 금이 간 것 같습니다.

공중화장실에 가면 벽이나 천장 같은 곳을 두리번거립니다. 아주 버릇이 됐습니다. 특히 벽에 못 자국이 많이 남아 있는 곳. 사방에 구멍이 메워진 흔적이 있으면 세포에 진저리가 지나갑니다. 동양식 변기라고 하는 곳의 변기 가운데가 눈썹 넓이로 길게 갈라져 있는 걸 보면 의심이 치고 올라옵니다. 속옷을 내리고 일을 보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불법 동영상을 찍고 그것을 만들기 위해 어린 여학생을 유인하고 협박해서 불법 음란 동영상을 만들고, 그것으로 돈을 버는 범죄 행위. 사람에 대한 총체적 범죄입니다. 인격은 몸에 깃들어 있으니까요.

그동안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리고 지켜내려 했던 민주주의. 이 기치를 내건 정권을 여럿 거쳤습니다. ‘민주’가 좀 진척된 건 있습니다. 말을 가려서 하지 않아도 되는 것. 직업의 귀천이 좀 누그러진 것. 양성 차별이 옅어진 것.

그런데 생존의 고독과 불안은 지금같이 깊고 넓은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한때 잘 사는 나라 대한민국, 한국에 오면 활력이 느껴졌답니다. 그런데 왜 자식을 낳기 싫거나 두려운 나라가 됐을까요.

요즘 뒤늦게 깨달아지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정치는 정치가를 위해 존재하는구나!

정치가 국민을 위한 것이라면 정치에 의해서 더 좋아지는 사회로 변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의 행태가 파렴치로만 보이니 저의 국민의식도 골병이 든 걸까요? 전쟁의 공포 없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국민의 오랜 소망을 해결하는 게 정치의 몫이란 믿음은 어리석은 탓, 크게 자책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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