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기자생활] 옛 신문에서 할머니를 발견했다
[슬기로운 기자생활]
이우연 | 이슈팀 기자
새해 첫날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장례식 중간중간 할 일이 없어지면 지난해 추석 때 함께 고스톱 치던 사진을 꺼내 봤다. 할머니와의 마지막 추억이다. 머리가 크고 나서부터는 연로해진 할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추억을 더 꺼내놓고 그리워하고 싶었지만 너무 어렸을 때 일들만 드문드문 기억날 뿐이었다.
내가 몰랐던 할머니를 보여준 것은 신문이었다. “너희 할머니가 학생 때 육상선수를 했는데, 한국 신기록도 세웠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시작이었다. 그런 일이라면 신문에 났을 법했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포털 신문데이터베이스 서비스에서 할머니 성함을 검색했다. 검색된 신문기사를 하나하나 읽다가, 놀랍게도 할머니 이름이 올라간 육상경기대회 기사를 여럿 발견했다. 뜬소문은 아니었다.
1950년 발행된 신문에는 어리긴 했지만 누가 봐도 우리 할머니인 사진과 관련 기사가 실려 있었다. 전국 남녀육상경기선수권대회 서울권 예선 여성 400m 이어달리기 경기에 출전해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는 내용이었다. 사진 속 할머니는 겨우 만 19살이었고, 화질은 좋지 않았지만 할머니 얼굴이 그대로 살아 있었기에 ‘풉’ 하고 웃음이 나왔다.
몇줄 안 되는 기사와 작은 사진을 보는데 머릿속엔 물음표들이 떠올랐다. 할머니는 왜 달리기를 시작했을까? 왜 하필 이어달리기였을까? 대답할 할머니는 세상에 없고 혼자만의 상상에 그쳤지만, 내가 몰랐던 할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기사가 고마웠다. 울다 지친 고모는 내게서 메신저로 받은 사진과 기사를 한참 동안 바라봤고, 아빠는 사진을 보자마자 신기하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기자는 마감이 있는 만큼 매일 성적표를 받는 직업이라 생각했다. 간혹 어떤 기사는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에게 읽히는 ‘에버그린 콘텐츠’가 되지만, 그런 경우는 흔치 않다. 기사가 나간 직후 포털 댓글이 많이 달리거나 다른 언론사의 추종보도가 이어지면 기분이 좋았다. 비슷한 맥락에서, 반향이 없는 기사는 죽은 기사처럼 느껴졌다. 한때는 주목받았던 기사도 이슈가 지나면 기사의 수명도 함께 끝났다, 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쓴 기사가 수십년은커녕 며칠 뒤의 독자에게도 가닿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살아왔다. 나조차도 지난 기사들을 꺼내 보지 않았다. 동료 기자들과 만나면, 포털사이트의 편집으로 ‘그날 읽히는 기사’와 ‘읽히지 않는 기사’로 나뉘는 현실을 한탄했을 뿐이다.
육상경기 결과 단신을 쓰던 73년 전 그 기자는, 그리고 선수들의 사진을 배치하던 기자는 알았을까. 그의 자손들이 이 기사와 사진으로 마음의 큰 위안을 받으리란 사실을.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쓰는 수많은 평범하고 단순한 기사도 왠지 특별해 보인다.
“나 같은 별 볼 일 없는 사람 얘기를 왜 기사로 썼어요?” 지난해 봄, 취재에 응해준 한 어르신이 물어왔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앞둔 청와대 인근 주민들을 취재하다가, 53년 동안 청와대 이웃 주민으로 살아온 이야기에 홀려 덜컥 인터뷰를 부탁했다. 평범한 사람이었으나 굽이굽이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엔 현대사의 주요 장면들이 녹아 있었다. 인터뷰가 실린 신문이 나온 날 신문 10부를 들고 그를 찾았다. 그의 단골 식당에서 함께 돈가스를 썰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밥 먹는 내내 기사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안 하던 그가 대뜸 ‘내가 뭐라고 기사로까지 다뤘냐’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뭐라 답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질문만은 또렷하게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를 보내드리며 자신 있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생겼다. “나중에 누가 그 기사를 보고 이런 이야기가,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알면 좋잖아요.” 그는 평범한 사람일 수 있지만, 그동안 지켜봐온 10명의 대통령에 대한 생각, 그리고 청와대 인근의 변화된 모습이 기사로 기록되는 순간 이야기는 특별해질 준비가 된다.
그러니까 이 글은, 미래의 독자를 위해서 온 마음을 다하겠다는 뻔하디뻔한 새해 다짐인 셈이다.
az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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