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데스크] 간첩은 '추억' 아닌 '실재'였다
발본색원해 실체 밝혀야
'공안몰이' 의혹도 존재
법과 증거만 따른 수사 필요
어린 시절 공공장소에선 '간첩 신고 3000만원, 간첩선 신고 5000만원' 안내판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군복 차림에 농구화'식의 간첩·무장공비 인상착의까지 친절히 예시로 들어놨다. 그때마다 '혹시 이 사람이…?' 하며 근처에 얼쩡대는 수상쩍은 아저씨들을 흘끔거리던 기억이 난다. 우리 이웃 누군가 한밤중 이불을 뒤집어쓰고, 혹은 야산에 올라 북과 교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 실제 간첩을 목격하진 못했어도 간첩은 실재하는 존재였고 경계의 대상이었다. 자라면서, 독재정권 반공교육의 실체를 알게 되고, 민주화가 이뤄지고, 여러 건의 대공 사건 조작 수사 논란이 불거지고, 진보정권들이 들어서면서 '간첩의 추억'은 점점 희미해졌다.
몇 해 전엔 미국 외교·안보 핵심 라인과 연이 깊은 지인으로부터 "(유사시에) 평양에 미군이 진입한다면 조선노동당사 ○○호실에 있는 캐비닛부터 확보할 것"이라며 "대한민국에 있는 고첩(고정간첩) 리스트가 거기에 보관돼 있는데 이게 공개된다면 한국이 뒤집어질 것"이란 말을 전해들었다. 그는 "사회 각계각층에 고첩이 암약하고 있고, 우리 ××(정부조직) 고위직 중 우두머리급 고첩이 있다"고 했다. '웬 극우 유튜버 같은 말씀을 하시나' 하는 생각에 그땐 그냥 웃어넘겨버렸다.
최근 전방위적으로 펼쳐지는 간첩단 수사를 보고 있자니 잊고 있던 간첩의 추억들이 다시 소환된다.
'요즘 세상에 무슨 북한 간첩이야….' 간첩 사건은 독재정권 시절, 불안감을 조성해 권력을 유지하고 반대세력을 겁박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됐다는 인식이 퍼져 있는 게 사실이다.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 씨 사건처럼 반복돼왔던 조작 논란도 이런 생각에 힘을 더했다.
정권과 공안당국의 악용과 조작, 과장은 있었을지언정 간첩의 실체까지 모두 부정할 순 없다. 남북이 여전히 군사적 대치 중인 분단 상황에서, 우방국 사이에서도 치열한 정보전이 벌어지는 마당인데, 북한 간첩이 없을 턱이 없다. 우리가 외면해왔을 뿐이다.
국가정보원과 경찰이 지난 18일 민주노총과 보건의료노조, 제주 지역 시민단체 등 10여 군데를 동시 압수수색했다. 민주노총 핵심 간부가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하고 국내에서 지하조직을 결성해왔다는 혐의라고 한다. 1992년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 이래 최대 간첩단 사건이란 평가도 나온다. 사건 수사 결과를 지켜봐야 하겠지만 법원이 압수수색영장을 발부한 것은 상당 부분 혐의가 소명되고 증거인멸을 막기 위한 필요성이 인정됐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공안당국도 수년 전부터 지하조직을 끈질기게 추적해왔다고 하니 하루아침에 급조한 사건으로 보기도 힘들다. 앞서 창원과 제주 등 지역에서도 유사한 구조의 지하조직이 적발됐다.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물들이 민주노총과 진보단체에 광범위하게 침투했고, 이들 단체가 정권 퇴진·반미 투쟁에 힘써온 것이 지하조직 활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 노동·시민단체 등 곳곳에 북의 지령을 받은 간첩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것인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철저한 수사로 이들을 발본색원하고 척결해야 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정권을 떠나 국가와 체제 수호를 위한 것이다.
다만 수사 과정에서 불필요한 시비에 휘말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당사자들의 반발이야 당연한 것이겠지만, '공안몰이 정국 조성'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지키기 위한 보여주기' 등 이번 수사의 타이밍과 의도에 대해 의심하는 시각도 분명히 있다. '진보단체나 현 정부 반대세력의 배후는 결국 북한'식의 프레임을 뒤집어씌우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오해나 억측을 줄이려면 오로지 법과 증거에 따른 정확하고 엄밀한 수사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호승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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