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건립 운동 ‘멋진 마무리’ 위해 사서가 되다
[서울&] [다시, 시작]
결혼 뒤 대기업 홍보지 회사 그만두고
방과후 강사로 초등생 독서 지도 활동
책 읽는 환경 위해 도서관 건립 뜻 모아
모임 만들고 대표 맡아 주민 서명 받아
관계자 설득하며 걸림돌 넘어서 준공
추진위원들이 ‘도서관 운영’ 배제되자
전문성 높이려 “사서 되자” 마음먹어
도서관 건립 운동이 진로도 삶도 바꿔
김은희(58)씨는 늦깎이 사서다. 전업주부에서 다시 중학교 사서가 돼 ‘인생 2장’을 살게 됐다. 이 ‘다시 시작하는 삶’의 배경이 된 것은 시민운동이었다. 그 시민운동은 동작구 사당동에 있는 사당솔밭도서관과 관련 있다. 사당솔밭도서관은 주민 서명을 시작으로 만들어진 특별한 공공도서관이다. 그 서명 운동을 주도한 이가 바로 김은희씨였다.
김씨는 결혼 전 대기업 홍보지를 8년간 만들다 결혼하며 회사를 그만뒀다. 1997년에 경단녀였던 김씨는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다. 이 일이 계기가 돼 주민센터에서 논술 강의를 하고 6년 뒤엔 초등학교에서 방과후 강의도 하게 됐다.
2008년 김씨는 성인 대상 강좌를 열어 엄마들에게 어린이 독서 지도법을 강의했다. 아이들이 책을 가까이하게 하려면 어떤 환경이 필요한지 엄마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동네에 도서관을 만들기로 뜻을 모았다. 그래서 ‘NGO 도서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하 도사모)을 만들고 대표는 김씨가 맡았다.
다음해, 도서관 건립을 위해 주민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연말에 김씨는 약 천 명의 서명이 담긴 종이를 들고 회원들과 구청을 찾았다. 사전 약속도 없이 방문해 구청장은 보지도 못하고 구청을 나서야 했다. 겨울바람이 매서웠다. 회원들의 실망한 얼굴을 보자 그냥 돌아설 수 없었다. 마침 구의회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구의원에게 도움을 청해 도서관 건립 민원을 접수할 수 있었다.
2010년 도서관 희망 부지 인근 땅을 소유한 주택조합이 도서관 건립 반대 민원을 넣었다. 구청 주선으로 조합과 만났는데 조합은 도서관 때문에 설계변경을 해야 한다며 “설계비가 얼마나 비싼데 당신들이 그런 걸 알아?”라며 큰소리를 쳤다. 김씨는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자신만 믿는 회원들을 생각하며 차분히 말했다. “도서관이 들어오기만 하면 부지 가치가 올라 분양이 더 잘될 거예요.” 조합 사람들도 생각해보니 김씨 말이 그럴듯했다. 조합도 민원을 철회했다.
2011년 기공식이 열렸지만 공사는 시작도 안 했다. 알고 보니 도서관 희망 부지를 주차장으로 쓰는 주민들이 도서관 건립 반대 민원을 넣었기 때문이었다. 김씨가 해결책을 내놨다. “지하는 거주자 주차장으로 지상은 도서관으로 만들면 되잖아요?” 그러려면 복합용지로 용도변경이 필요해 구청이 서울시에 용도변경을 신청했다.
이즈음 김씨는 사서자격증을 따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2013년 1년 과정의 사서교육원에 등록했다. 석사 출신이라 1년 교육과정으로 자격증을 딸 수 있었다.
그해 봄, 도서관 부지 용도변경 승인이 나더니 건축이 급물살을 탔다. 개관을 위해서 공무원 말고도 운영위원회, 자료선정위원회에서 일할 여러 위원이 필요했다. 서점 대표도 ‘위원’에 위촉됐는데, 도사모는 한 명도 위촉되지 못했다. “일개 시민이 전문성도 없으면서….” 그런 말이 들렸다. 뭘 얻으려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간 일을 생각하니 김씨는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9월 사당솔밭도서관이 개관했다. 도사모는 도서관에 장소 대여를 요청했는데 그것도 안 됐다. 도사모는 배제되는 느낌이 들었다. 오기가 생겼다. ‘전문성이 없다고? 사서 자격증 나도 따서 도서관 사서 하고 만다.’
김씨는 사서교육원 과정을 처음엔 쉽게 생각했다. 수업은 주 4회 저녁에 3시간씩 진행됐다. 맨 앞자리에서 열심히 들었지만 세 과목이 어려웠다. 첫 시험 성적이 형편없었다. 김씨는 오전에 방과후 강사를 하느라 시간이 부족했다. 시간 확보를 위해 방과후를 정리했다. 수업을 따라가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교수 질문에 누가 답을 잘하는지 살펴보니 한 동기가 눈에 띄었다. 그 동기와 자연스레 모임을 만들어 시험 기간에 한 시간씩 먼저 만났다. 이해 안 된 내용을 동기에게 물으면 동기가 쉽게 설명해줬다. 덕분에 과정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김씨는 늦깎이 학생들을 위해 당부 말을 전했다. “나이 들어 공부할 때는 소모임을 만드세요. 머리가 굳어 혼자는 할 수 없어요. 그 친구도 우리랑 복습한 게 도움됐다고 하더라고요.”
다음해 김씨는 공공도서관이라면 전국 어느 곳이든 사서 채용에 응했다. 고등학생 둘째가 걱정됐지만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그만큼 사서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면접 오라고 연락해 온 곳은 한 곳도 없었다.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러던 중 방과후 일을 찾아야 하나 싶어 교육청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학교 사서 채용공고를 보게 됐다. 그때까지 학교 사서는 아예 생각을 못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 일자리가 있었다. 김씨는 도서관 프로그램 계획서 열 장을 첨부해 학교 사서로 지원해 합격했다. 그렇게 김은희씨는 나이 49살에 기간제 사서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취업하니 문제가 닥쳤다. 업무를 알려줄 사수가 없었다. 하루하루 지뢰밭으로 출근하는 기분이었다.
출근 첫 주, 김씨는 재학생 진급 작업을 위해 학생 명단 파일을 내려받다가 그만 삭제 버튼을 눌렀다. 머리가 하얘졌다. 호흡을 가다듬고 한국교육학술정보원으로 전화했다. 상담원은 임시 저장 파일이 있는 곳을 알려줬다. 가장 기억에 남은 큰 실수다. 도서관 프로그램을 진행할 땐 학생들에게 간식으로 주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계란을 삶은 날도 있었다. 어떤 땐 학생들과 차이나타운에 방문하는 프로그램을 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김씨는 열정이 넘치는 사서다.
채용 2년 뒤 김씨는 무기직으로 신분이 전환됐다. 지난 12월, 힘들었던 사서 적응기를 담은 신간 <용띠 사서 다이어리>(달꽃 펴냄)를 출간했다.
김씨는 사서직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방법을 알려줬다. “공공도서관으로 가고 싶으면 평생교육사 자격증을 같이 따세요. 학교로 가고 싶으면 논술지도사 자격증이랑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보면 좋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도서관 경력이 필요해요. 하루 일하는 대체 사서 공고도 올라오니까 경력을 꼭 쌓으세요.”
아이들에게 도서관을 만들어주려고 주민 천 명의 서명을 받아내며 힘겹게 도서관 건립을 이끌었던 김씨는 도서관으로 자신의 진로도 삶도 바꿨다. 도사모를 이끌며 보여줬던 김씨의 리더십과 열정은 사서가 되는 길에도 자양분이 됐다. 지금도 김씨는 학생들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도서관을 만들어주기 위해 열정을 쏟고 있다. 사서 정보 카페: 사서e마을 https://cafe.naver.com/lisleader.
글·사진 강정민 작가 ho098@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한겨레 금요 섹션 서울앤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