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빵야’ “일제 장총이 말하는 꿈과 아픔”[인터뷰]

2023. 1. 19.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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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김태형ㆍ배우 문태유 이진희
오는 31일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개막
근현대사 관통한 1945년생 장총 의인화
전쟁과 폭력의 시대 보내고 공연 소품의 삶
“질곡의 역사 보낸 우리에게 보내는 위로”
일제 99식 소총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 ‘빵야’에 출연 중인 배우 문태유(왼쪽) 이진희는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빵야’는 질곡의 역사를 보낸 우리에게 보내는 위로”이자 “다양한 볼거리를 담은 종합선물세트같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이상섭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죽음을 부르는 소리, “빵! 빵! 빵! 빵!”

소리가 울릴 때마다 한 사람씩 쓰러진다. 펑펑 울진 않았다. 그런데 흐느끼는 것만 같았다. 빵야의 등이 들썩이고, 파르르 떨렸다.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 같았지만, 사력을 다해야 했다. 사력을 다하는 것이 괴로웠다. ‘존재의 증명’은 너무도 가혹했다. 그럼에도 이것이 ‘빵야의 삶’이었다. 그의 아픈 몸부림을 보던 나나는 “이제 그만하자”며 등을 감싸안는다. “어떻게 해야 은하수를 끌어와 무기를 씻을 수 있을까.” (연극 ‘빵야’ 중 나나의 대사)

1945년 2월 인천 부평 조병창 출생. 그는 총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산물, ‘99식 소총’. 무기로 태어난 그의 삶은 기구하고, 슬프다.

“빵야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총이라는 것에 대해 상당한 아픔과 회의감이 있는 친구예요.” (문태유) 존재의 이유는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쓸모’를 증명하는 것은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에 쓰인 총이기도 하지만, 그 삶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직장상사의 명령이나 사회적 요구에 의해 어쩔 수 없는 일을 하게 되는 우리의 삶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김태형 연출)

한국 근현대사 살아온 일식 장총의 삶…문태유·이진희 호흡

일제 99식 소총은 한국 근현대사의 한복판을 생생히 살아왔다. 제2차 세계대전부터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베트남전쟁에 이르기까지. 연극 ‘빵야’는 그 총의 생애를 무대로 올렸다. 대한민국 연극 사상 최초로 총이 말을 하는 작품이다. 지금 공연계에서 가장 바쁜 연출가 중 한 명인 김태형이 진두지휘하고,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tvN)의 문태유, ‘왜 오수재인가’(SBS)의 이진희가 주연배우로 호흡을 맞춘다. 하성광 정운선이 더블 캐스팅 됐다.

최근 ‘빵야’ 연습현장에서 만난 김태형 연출가는 “신선하고 새로운 작품이다. 전에는 본 적 없는 형식의 공연이 문학적인 대사와 함께 태어났다”고 말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올해의 신작’으로 선정된 연극 '빵야'의 연습현장. 이상섭 기자

극본이 완성된 것은 2020년이다. 차범석 희곡상(2016)을 받은 극작가 김은성의 신작.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상징하는 비극적 몸체”(김은성)인 장총이 주인공이 된 작품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올해의 신작’으로 뽑혀 오는 31일(LG아트센터 서울)부터 관객과 만난다.

’빵야‘는 커다란 두 축으로 흐름을 이어간다. 한 물간 드라마 작가 나나(이진희)의 시선과 1945년 부평 조병창에서 태어나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살아온 빵야(문태유)의 시선이다. 연극은 작가 나나가 소품 창고에서 총 한 자루를 발견하며 시작된다.

독립군을 토벌하고, 제주 4.3 사건을 마주하고, 6.25 전쟁에서 동지였다 적이 되고, 빨치산을 토벌한다. 사냥을 하고, 로비 선물이 됐다가, 공연 소품으로 자리한 70여년 빵야의 삶. 나나를 처음 만난 빵야는 이렇게 말한다. “내 이야기를 들려주면 내 소원을 들어줄 수 있어?” 나나와 빵야의 이야기, 나나가 쓴 드라마가 교차하며 연극은 이어진다. 작품엔 나나와 빵야를 비롯해 빵야를 거쳐간 수많은 주인들, 나나의 대본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는 제작사 사람들도 등장한다.

문태유 “노년의 빵야가 아닌, 장면마다 다른 접근”

‘빵야’를 연기하는 문태유는 “작품 안에서 한국 근현대사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는데, ’빵야‘를 통해 지난 100년간 너무나 슬프고 비극적인 일들이 많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사람의 생으로 치면, 일흔을 넘긴 노년이다. 하지만 문태유는 ‘의인화된 총’을 노인으로 연기하지 않는다. “나이대에 따라 세월의 흔적을 표현해야 하나 많은 고민을 했고, 이런 저런 시도로 방향을 찾아갔어요. 어설프게 70대의 목소리를 흉내내느니 피하고 싶었어요. 인간의 시선과 개념은 내려놓고, 각각의 신마다 다른 접근을 했어요.” 어떤 장면은 구연동화로, 어떤 장면은 무협소설로, 어떤 장면은 리얼리티를 살려 다양한 빵야의 모습을 담았다.

연극 '빵야'의 연습현장. 이상섭 기자

문태유와 김태형 연출과는 뮤지컬 ‘아몬드’ 등 다수 작품을 통해 만나왔다. 김 연출가는 “문태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서 쇳소리, 총소리가 들려 무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목소리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작품엔 유달리 나나의 대사가 많다. 나나는 빵야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이자, 이 연극의 상황 상황을 설명하는 해설자이기도 하다. “절대적으로 대사의 양이 많더라고요. 다른 모든 인물의 대사를 합친 것보다 나나의 대사가 많아요. 대본의 70% 가량을 차지하고 있어 지금도 입시생처럼 외우고 또 외우고 있어요.”

가장 고민한 지점은 ‘의인화된 총’을 대하는 태도다. 이진희는 “‘빵야’ 안에 나오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결국 나나가 쓴 드라마이기에, 각각의 인물을 바라보는 태도와 이입하는 정도를 고민하며 연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관객에게 설득력있게 다가서기 위해서다.

연출 김태형 “수많은 사람들, 질곡의 삶 펼쳐진다”

개막이 다가올수록 배우와 제작진은 온전히 작품 안으로 들어간다. 문태유는 “작품에 쓰여진 대사의 고민을 연극을 만들어가며 우리가 그대로 하게 됐다”고 말했다. 연극은 ‘총의 여정’을 통해 근현대사를 관통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삶과 죽음”(문태유)을 만나고, 나나를 통해 “역사이야기를 창작하는 사람들의 고민”(이진희)를 나누게 한다.

“총은 예쁜 물건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고, 전쟁과 전투에 사용된 무기잖아요. 이 무기가 가진 전쟁, 폭력의 역사를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를 지나가죠.” (김태형) 작품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그 안에서 살아남고 버틴 질곡의 삶이 펼쳐진다. “작품 안에서 굉장히 많은 죽임이 나오는데, 배우와 스태프들 모두가 우리 작품이 너무 많은 죽음을 전시하는 것이 아닐까 끊임없이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문태유) “작가 나나를 통해 예술을 만드는 창작자로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이토록 민감하고 소중한 역사 이야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고민할 것인지도 이야기하고 있어요.” (김태형 연출)

연극 ‘빵야’에서 드라마 작가 나나 역을 맡은 배우 이진희는 “워낙에 대사 양이 많이 지금도 입시생처럼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나는 빵야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이자, 작품의 상황상황을 설명해주며 관객들의 이해를 돕는다. 이상섭 기자

빵야의 굴곡진 70년을 돌아보면,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의 기운이 강렬하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고 설파하는 ‘러브 유어셀프’ 시대인데,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장총의 삶은 아프다. “최선을 다해 사는 것도 곤란하고, 영웅적 삶을 살라고 하기에도 뭐하죠.” (김태형) “제가 빵야라면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할 것 같아요.” (문태유) “아니면 좋은 사람의 손에 있거나.”(이진희) 그래도 빵야에겐 꿈이 있고, 나나가 있다. 꿈과 타자를 통해 치유 받고 위로받는다. 굳이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꿈을 품었기에 새 삶의 가능성과 희망도 있다.

“‘빵야’는 죽음과 폭력, 파괴의 역사에서 생명과 아름다움을 창작하는 시대로의 전환, 목적이 달라진 시대의 이야기를 담았어요. 20세기가 총과 폭탄, 전쟁의 역사였다면 21세기는 다른 역사가 되리라는 꿈을 꿀 수 있는 이야기인 거죠.” (김태형) “잔인한 이야기 속에도 아름다운 삶이 녹아 들어있어요. 근현대사는 물론 드라마 작가를 통해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생생한 과정도 볼 수 있는 재미가 있죠. 종합선물세트같은 작품이에요.” (이진희)

문태유는 ‘빵야’는 과거가 아닌 오늘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빵야는 45년생인데, 저희 할머니가 30년생이에요. 오래전 이야기가 아닌 지금을 함께 살아가는 현재의 이야기인 거죠. 누군가의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이야기예요. 이 작품은 역사를 뒤흔든 많은 일들을 겪어온 우리에게 보내는 심심한 위로예요. 나나의 위로가 관객들에게도 전해지길 바라고 있어요.” (문태유)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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